서울 종로구 출신으로, 1896년 10월 2일 태어났다. 아버지 이태성(李泰晟)과 어머니 고소우리(高所禹里)의 장녀이다. 어릴 적 옆집에 살던 여섯 살 위의 김상옥(金相玉)과 서울 종로의 연동교회(蓮洞敎會)를 같이 다니며 오누이처럼 친해진 인연으로 훗날 독립운동의 동지가 되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61년 2월 7일 사망하였다.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의 경성애국부인회(京城愛國婦人會)가 창립될 때 동참하였고, 그 해 10월 결성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에서도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김상옥, 김동순(金東淳)의 주도로 결성된 독립운동 비밀결사 암살단의 취지문 300장 등사를 부탁받고 수행하였다. 암살단의 8월 거사 계획이 실패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탈출하였던 김상옥이 재거사를 위해 1922년 12월 서울로 잠입하였을 때 일주일가량 자기 집에 은신시켰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를 결행한 후, 삼판통(三坂通)의 은신처를 습격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1월 17일 그의 집을 찾아오자 건넌방에 머물게 하고 어머니와 함께 동상(凍傷)을 치료해 주었다. 또한, 김상옥이 장충단(獎忠壇) 돌다리 밑에 숨겨둔 쌍권총을 찾아다 주고, 윤익중(尹益重)이 보낸 거사 준비금 100원을 받아 전해주기도 하였다.
1월 22일 새벽, 그의 집을 겹겹이 포위 · 습격해 오는 경찰 병력과 총격 혈전을 벌이던 김상옥의 장렬한 최후를 목도한 후, 바로 붙잡혀가 모진 취조를 당하였다. 기소된 후, 고문 후유증인 늑막염과 오른쪽 다리 골절에 탈진까지 겹쳐 병보석을 받았으나 회복이 안 되었다.
1923년 12월, 마차에 실려와 들것에 누운 채로 신문받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고도 한동안 더 치료받아 기동이 가능해지고서야 서대문형무소에 입감(入監)하여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建國褒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