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태희(金泰熙, 金台熙)이고, 김기득(金奇得)은 독립운동 초기에 쓰인 이명이다. 1899년 11월 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창엽(金昌燁)이다.
정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으나 1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용산철도학교(龍山鐵道學校)에 들어가 1년간 수학하였다. 그 후 17세부터 20세까지 부산역 전신계(電信係) 직원으로 일하였고, 1918년 9월부터 철도국 임시 직원이 되었다.
1919년 3월 23일 밤, 서울 종로3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혔다. 재판 받고 1심에서 징역 8월형이 언도되었으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20년 3월경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제1차 국내 적 기관 총공격 거사에 동참하기 위해 4월경 서울로 들어와 사직동(社稷洞) 본가에서 은신 대기하였다. 6월 중순에 부산으로 가서 폭탄 보관 책임자 이수택(李壽澤을 만나 김원봉의 조속결행 명령을 전달하고 귀경하던 중 서울역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소위 밀양폭탄사건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마포(麻浦) 경성감옥에서 복역하다 감형되어 1926년 4월 출옥하였다.
그 후 영화사 극동키네마에 들어가 일하다가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갔다.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오사카지회 창립 때 서기장 겸 10인 대표위원의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다 귀국하여 1929년 김단야(金丹冶) 주도의 ‘조선공산당 재조직 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다가 1930년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31년 10월 징역 2년형을 받고 복역한 후 1933년 2월 만기 출옥하였다. 그러나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두 달 만에 병사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