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봉은 당시 나이 26세로서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20년 11월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에 거주하는 김상윤(金相潤)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유받고 응낙하였다.
이에 김상윤은 최수봉을 대구부(大邱府) 근처에 거주하는 김원석(金元錫)에게 소개하였다. 김원석은 최수봉에게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리기 위하여 밀양경찰서를 파괴하고 일본경관을 살해할 것을 지시, 12월 26일 그에게 폭탄 2개를 줌으로써 이튿날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경 최수봉은 먼저 서장의 훈시를 듣기 위하여 서원들이 모여 있던 밀양경찰서 사무실 안에 창문 밖에서 폭탄 1개를 던졌다. 이 첫번째 폭탄은 순사부장의 어깨에 맞고 탁자 위에 떨어졌으나 불발되었다.
이어서 현관쪽에서 폭탄을 복도쪽으로 던졌다. 이 두번째 폭탄은 폭발하였으나 일경들 가운데 특별한 사상자는 없었다. 폭탄을 던진 최수봉은 일제경찰의 추격을 받아 붙잡히고 말았다.
이 사건 직후 김상윤 · 김원석은 도피하여 붙잡히지 않았는데, 김원석은 1925년 자금모집을 위하여 입국하였다가 붙잡힌 의열단원 양건호(梁建浩)의 취조를 통하여 양건호와 같은 사람임이 밝혀졌다.
즉, 양건호 · 김상윤 등은 안학수(安鶴洙)의 소개로 일찍이 국외에서 폭탄제조법을 습득한 고인덕(高仁德)에게 폭탄제조법을 배워 폭탄을 제조하여 이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최수봉은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마침내 교수형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