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2월 19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府內面) 내이동(內二洞) 848번지에서 태어났다.
20세 때인 1908년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3월 13일 밀양읍내 독립만세시위의 사전 기획에 조력하고 시위 현장에서 앞장섰다. 그 일로 부산감옥에서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후 밀양구락부(密陽俱樂部) 대표가 되었다.
1920년 중국 상하이[上海]의 의열단(義烈團) 본부에서 국내 적 기관 총공격을 위해 들여보낸 1차분 폭탄 3개를 넘겨받아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재차 붙잡혀갔다. 징역 3년형을 서울 마포의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4년 1월 출옥하였다.
1925년 3월 밀양청년회 문화부장으로 선출되었고 10월에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 사이 5월 6일에 신사상 연구와 동척농장(東拓農場)의 소작인운동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오륙회(五六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1월 초순에 의열단 간부 이종암(李鍾巖)의 거사용 자금 모집활동, 소위 ‘경북의열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대구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예심의 면소(免訴) 결정으로 1926년 11월 석방되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밀양지회 창립 때 부회장으로 피선되어 1930년 3월까지 재임하고, 그 후 검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7월 창립된 밀양청년동맹도 지도하여 ‘밀양 청년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졌다. 1938년 12월부터 『동아일보』 밀양지국 기자로 일하였다.
1945년 8 · 15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밀양지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10월 21일의 밀양인민위원회 결성식에서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4월 좌익 계열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미군정 경찰에 잡혀 갔다 풀려나기도 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