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당 등 우익계 세력과 대항하여 정식으로 국민대표기관이 구성될 때까지 과도적 임시국회의 기능을 맡아 과도정부 수립을 담당하며, 미소공동위원회의 임시정부 조직사업에 있어서 남한의 유일한 민족대표로서의 참여를 의도하여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에 의하여 결성되었다.
의장단으로서는, 의장에 여운형(呂運亨)·허헌(許憲)·박헌영(朴憲永)·김원봉(金元鳳)·백남운(白南雲), 부의장에 백용희(白庸熙)·홍남표(洪南杓)·이여성(李如星)·김성숙(金星淑)·장건상(張建相)·윤기섭(尹琦燮)·성주식(成周寔)·정노식(鄭魯湜)·유영준(劉永俊)·한빈(韓斌)이 선출되었고, 상임위원으로는 의장단을 포함하여 73명, 중앙위원은 전국에서 305명이 선출되었다.
사무국장은 이강국(李康國), 조직부장은 홍덕유(洪悳裕), 선전부장은 김오성(金午星), 문화부장은 이태준(李泰俊), 재정부장은 정노식, 기획부장은 최익한(崔益翰), 외교부장은 강진(姜進)이 맡았다.
강령은 9개 항으로 되었고, 특히 제9항에서 ‘행동슬로건’으로 38개 항의 정책을 나열하였는데, 모두가 조선공산당의 주장과 대동소이하였고, 같은 해 2월 8일에 발족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당면목표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 단체의 결성은, 같은 해 2월 1일 결성된 김구(金九) 중심의 비상국민회의와 2월 14일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한 대한국민민주의원에 대응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단체의 결성에 따라 좌우익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우익계의 비상국민회의와 좌익계의 이 단체는 서로 과도적 임시국회의 역할을 자임하며 과도임시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고, 전자는 신탁통치 반대, 후자는 신탁통치 찬성의 태도를 취하였다. 따라서 양자는 매사에 있어서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는 광복 뒤 처음 맞이한 1946년 3·1절 기념행사마저도 따로 거행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조직형태로는 좌익단체들의 민주적 연합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공산당에 의하여 움직여졌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남조선노동당의 주요 간부들이 북한으로 탈출하고 지하로 들어가게 되자 이 단체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명목상으로는 1949년 6월 27일평양에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과 통합하여 조선노동당의 외곽단체인 조국통일민주전선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