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북도의 교육 진흥을 표방한 교육계몽운동단체로 교남교육회라고도 한다. 박정동(朴晶東)의 발기로 1908년 3월 15일 창립되었으며, 본부는 서울 전동(典洞)의 전 한어학교(漢語學校)에 두었다.
초대 임원은 회장에 이하영(李夏榮), 부회장에 상호(尙灝), 총무에 손지현(孫之鉉), 평의원에 박정동·이각종(李覺鍾), 간사원에 이원식(李元植)·이규한(李圭漢)·김병필(金秉泌), 서기원에 유시봉(柳時鳳)·이종연(李鍾淵), 재무부장에 장길상(張吉相), 회계원에 장택환(張宅煥)·권중훈(權重勳), 도서부장에 박정동, 교육부장에 안택중(安宅重) 등으로 구성되었다.
1908년 4월에 간행된 기관지 『교남교육회잡지』 창간호에 교남학회의 창립 취지가 실려 있다. 바로 전해인 1907년에 정미칠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다. 또 그 해 2월 말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방해 공작으로 퇴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에 의해 1908년 1월에는 서우학회(西友學會)가 강제 해산당했다. 나아가 통감부 당국은 국권회복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해 온 애국계몽단체를 탄압, 통제하기 위해 ‘학회령(學會令)’을 선포하여 모든 학회는 학부대신의 승인을 받도록 조처하였다. 이 시기에 학회령에 의해 조직된 단체가 교남학회였던 것이다.
이 단체는 원래 교남 지방의 교육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먼저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이어 경상도에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로 활동 방향을 정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민족교육열을 앙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학교 설립은 부진하였고, 다만 기관지인 『교남교육회잡지』를 통권 12호까지 발행했을 뿐이다. 기관지는 1910년 5월 25일자로 12호까지 낸 뒤, 해산 결의도 없이 해산되었다. 당시 일제가 우리 민족의 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봉쇄하기 위한 사전조처로서 각종 단체를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애국계몽운동 퇴조기에 설립된 교남학회는 각박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민족교육의 주체성을 회복시키지는 못했으나, 지방 출신 인재의 교육기회를 넓혀준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