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이대위(李大爲), 박영순(朴永淳), 김성무(金聖武), 장경(張景), 박선겸(朴善謙), 김병모(金炳模), 전동삼(全東三), 김찬일(金贊一), 박승지 등이 주도하여 친목회를 조직하고 현지 한인들을 계몽하고 단합하고자 하였다. 이 친목회는 1904년부터 하와이 한인 이민 노동자들이 미국 본토로 이주해 오자, 이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취업을 알선할 목적으로 로스앤젤레스 리버사이드에 공립협회를 창설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한국의 식민 지배를 본격화하자 1905년 4월 안창호를 비롯하여 송석준(宋錫峻), 정재관(鄭在寬), 임준기(林俊基), 이강(李剛), 임치정(林蚩正), 방화중(邦化重) 등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존의 ‘리버사이드 공립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친목회를 통합, 발전시켜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한 공립협회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공립협회는 연장적 성격을 지녔을 뿐 조직 체계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미국 본토에는 공립협회 외에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공제회(共濟會), 동맹신흥회(同盟新興會) 등 4개 단체가 존립하였으나, 당시 미주 한인 사회를 선도한 단체는 공립협회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11월 22일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창간하였고, 중앙총본부인 공립관(共立館)을 설치하고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는 지회를 설립하였다.
공립협회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내외 독립 운동 단체들과 연합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3월 경부터 하와이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와의 통합을 추진, 11월에는 합동발기문을 발표하고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를 창립하였다.
국민회가 설립되면서 기존의 한인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변경되었다. 이어 1910년 2월에는 국민회가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5월 10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설립됨으로써 미주 및 멕시코 단체들까지 통괄하는 단체로 발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