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학회가 추진한 사업은 경전(經典)을 강명(講明)하여 도덕을 존숭(尊崇)하는 일, 신지식이 발달한 서적을 비치하여 강습(講習)을 자(資)하는 일, 수신 처세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일, 신금강연소(神衿講硏所) 수 처를 설치하는 일, 학교를 설치하여 동지(同志) 자제(子弟)를 교육하는 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관한 실업을 흥기(興起)하는 일, 강의록과 회보와 잡지를 발간하는 일, 도서관을 지어 공중의 열람을 제공하는 일, 기타 본회의 유익한 사업을 점차 확장하는 일 등이었다.
이러한 설립 목적에 따라 대동학회는 일요일마다 명망 있는 인사들을 초빙하여 순회 강연을 실시하였다. 또한, 학회 내에 편집부를 설치하고 1908년 2월부터 『대동학회월보(大東學會月報)』를 발간하여 유교, 법학, 경제, 실업 등 다양한 주제의 기사를 실었으며, 1909년 9월 통권 2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908년 3월 대동학회 회관 안에 대동전문학교(大東專門學校)를 설립하고 신입생 235명을 선발하여 개교하였다. 1909년 봄, 1년 과정의 속성과는 50명의 학생을 졸업시킨 후 폐과되었고 본과만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졸업생은 관리, 교육계, 변호사, 사무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동학회는 신기선에 대한 비난 여론과 학회 내 갈등 등으로 인해 활동이 저조해지기 시작하였다. 1909년 2월 회장 신기선이 사망하면서 학회가 폐지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1909년 10월 공자교(孔子敎)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