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진회(共進會)는 민찬호, 이내수(李來洙), 임준호(任準鎬), 임정수(林正洙) 등이 동포들이 합력일심(合力一心)하여 환란을 서로 구제하고 교육을 장려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민찬호(閔讚鎬)가 임명되었다. 회장을 역임한 민찬호는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받고 토론 단체였던 협성회에서 활동하였다. 1901년 한국 감리교 서울 전도사로 임명되어 교회 내 청년 교육과 야학 수업을 운영하였다. 이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1905년 8월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제2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한인 사회의 친목과 교육을 위해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하와이 한인 사회에는 여러 단체가 설립되었다. 하와이 8개의 섬에 나뉘어 있던 한인들은 지역별, 농장별로 각각의 단체를 성립하였는데, 대체로 항일과 동족상애 (同族相愛)와 상호보호(相互保護)를 목적으로 내세운 자치 계몽 단체의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여러 한인 단체가 활동하면서 한인 사회가 분열되고 인적, 경제적으로 국권 회복 운동을 추진하는 데에도 문제가 발생하자 단체를 통합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하와이에서는 공진회와 에와(Ewa)친목회를 중심으로 한 한인 단체들이 1907년 봄부터 통합 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통합 운동의 결과 1907년 8월 말 공진회를 비롯해 하와이 각 지역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의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합동 발기대회를 개최하였다.
회의 결과, 4개 조의 합동 결의안을 통과시켜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설립하고, 기관지로서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공진회는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되었고, 기관지였던 『공진회보(共進會報)』도 『한인합성신보』로 통합되어 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