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찬호(閔贊鎬, 1877~1954)는 황해도 평산도호부(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출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이명(異名)은 민찬호(閔燦鎬) · 민찬호(閔讚鎬)이다.
1894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재필의 지도로 결성된 토론 단체인 협성회에 가입하였다. 협성회에서는 주로 회계 업무를 맡았으며, 1898년 이승만과 함께 임원으로 활동할 때는 조직의 책임자를 맡았다.
서울정동교회의 엡윗청년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01년에는 한국 감리교 서울 전도사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03년 최병헌 목사가 정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자 교회 사무를 도우며 청년 교인들을 위한 야학 수업을 진행하였다.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 2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1906년에는 한인감리교회 내 한인기숙학교를 만들어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1907년에는 호놀룰루에서 결성된 한인합성협회에 참여하였고 1908년 11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대표로 북미 공립협회와 합동 발기인이 되어 1909년 2월 국민회를 창립하였다. 1911년 하와이 생활을 정리하고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하였다.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제1차 대표원회에서 중앙총회 학무원에 임명되었고, 1913년에는 북미지방총회 산하 클래몬트학생양성소 감독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 등이 흥사단을 조직할 때 단우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8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결정으로 정한경, 이승만과 함께 시카고에서 열린 제1차 소약소국동맹회의에 참석하였고, 세 사람의 명의로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 통치를 청원하는 서한을 보냈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지시로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한인자유대회에 파견되었다.
1919년 이승만의 요청으로 하와이로 돌아가 한인기독학원과 하와이한인기독교회를 관리하였다. 1921년에는 하와이교민단 단장을 맡아 미국 국무장관 등에게 우리나라 대표단의 워싱턴회의 참가 승인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같은 해 7월 호놀룰루에서 이승만과 같이 동지회를 창립하였다.
1923년 6월에는 한인기독학원 부지 이전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김노디 · 김영우와 학생 20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을 이끌고 국내에 들어와 9월 초까지 30개 이상의 지역을 순회하였다. 1928년 4월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1930년 1월 하와이한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8년 12월에는 중한민중동맹단 이사장, 1943년에는 중한민중동맹단 단장,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4년에 중국 충칭〔重慶〕에서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대표회의에서 명예주석단에 선출되었다.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