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임을 주도한 인물은 김영기·김윤배·김유실·김유택·이상호·이복기 ·이원준·이태성·이성신·오계상·몬또라·민찬호·박상하·박인양·신국겸·손덕인·안현경·안원규·양유찬·정인수·정운서·조광원·조병요·황혜수·홍한식·김경준·정원명 등 29명이고 회장은 조소앙(趙素昻)의 형인 조용하가, 서기는 교민단 단장인 최창덕이 맡았다.
이 촉성회는 하와이 한인 166명이 연명한 ‘한민족통일촉성선언서’를 발표해 3대 강령을 제정했는데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전 민족의 정신을 단결해 운동의 전선을 일치케 함, ② 전민족의 역량을 집중해 대업의 담책(책임을 져 담당함)을 함께 지게 함, ③ 전민족의 이상을 종합해 국가의 건설을 신미케 함으로 되어 있었다.
이를 볼 때 촉진회의 성격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해외 한인들의 통일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설립 목적도 “대한 민족의 통일을 촉성해 독립운동의 단일기관을 창설함에 재함”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때 본회를 해산할 것임을 밝힘으로써 통일운동기구로서 촉성회의 소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단체의 조직은 서무부(부장 최창덕), 선전부(부장 민찬호), 의사부(부장 이복기)로 되어 있고 집행위원으로 21명이 있어 통일운동사업을 뒷받침하였다. 21명의 집행위원은 대조선독립단과 교민단 그리고 중립자측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하와이 한인들을 비롯한 전체 한인들의 대동단결을 지향하려는 촉성회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들 집행위원들을 보면 대조선독립단에서 이복기·이원순·김윤배·이상호가, 교민단에서 최창덕· 민찬호·안원규·김영기·김유실·정인수, 그리고 어느 쪽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중립측에서 조용하·오운·안창호·문또라·황혜수·정원명·박상하·홍한식·안현경·정운서 등이다.
그러나 촉성회의 활동은 1928년 5월 21일에 개최한 제1차 대회 개최 이후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그 이유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통일운동 방식을 설정하지 못한 점과 통일운동의 대상을 전민족으로 확대함으로써 이상적인 통일론에 치우친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용만의 피살로 구심점을 잃은 대조선독립단원들의 활동 위축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미약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촉성회의 결성은 1930년대 하와이 한인 사회의 통일운동 전개에 하나의 원동력을 제공해 준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 단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