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 본격화에 맞서 만주 · 베이징[北京] · 상하이[上海] 등의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된 해외운동 진영의 통일과 항일 역량 규합을 도모하기 위해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열단을 중심으로 1932년 10월부터 상해에서 여러 차례의 준비회의를 갖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였다.
1932년 10월 12일 한국독립당 대표 이유필 · 송병조 · 김두봉, 조선혁명당 대표 최동오,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 · 신익희, 조선의열단 대표 한일래 · 박건웅, 한국광복동지회 대표 김규식 등이 상하이에서 회합하였다. 10월 23일 준비위원회를 열어 연합체의 명칭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으로 정하였다. 1933년 재미 대한독립당 · 대한민족총회, 뉴욕 대한인교민단 ·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 하와이 대한인동지회 · 재미 대한인국민회총회 등이 가맹하였다. 또 중국측 항일운동과도 제휴하여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였다.
일본군이 상해를 침공한 뒤에는 활동무대를 난징[南京]으로 옮겼으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애초에 각 단체 간의 연락 및 협의기관이라는 조직적 제약이 뚜렷했기 때문에 한국독립세력의 통일기관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의열단 인사들을 중심으로 ‘통일동맹’을 기초로 한 새로운 정당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1935년 6월 29일 신당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7월 5일 조선의열단 · 한국독립당 · 신한독립당 · 조선혁명당 · 대한인독립당이 연합한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노선이 달랐던 까닭에 통합 추진 당시부터 알력다툼이 있었다. 일례로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할지 ‘한국민족혁명당’으로 할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다. 또 민족혁명당 결성의 모체가 되었던 단체들이 표면적으로만 해체성명서를 발표하고 실제로는 여전히 독자적 대외활동을 이어나갔고. 서로 간의 혁명노선의 차이로 결성 7개월 만에 조직 내의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 분열은 구성원간의 사상적 차이와 함께, 독립운동방략의 차이에 대한 갈등, 그리고, 양대세력인 김원봉과 지청천(池靑天) 양파의 대립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특히 김원봉파인 조선의열단의 전횡과 독단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 결과 한국독립당의 박창세(朴昌世) · 조소앙(趙素昻)과 신한독립당의 민병길(閔丙吉) · 조성환(曺成煥) · 홍진(洪震) 등이 1935년 9월을 전후하여 탈당하여, 민족혁명당의 기세는 크게 저하되었다.
당 잔류 인물들은 1937년 1월, 난징에서 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조직을 '민족혁명당'으로 결의하고, 김원봉 · 지청천 · 윤기섭(尹琦燮) · 성주식(成周寔) · 신익희(申翼熙) · 윤세위(尹世胃) · 김상덕(金尙德) · 최동오(崔東旿) · 천병일(千炳日) · 유동열(柳東說) · 김홍서(金弘敍) · 이경산(李景山) · 정팔선(鄭八仙) · 정일붕(鄭日朋) 등을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전당대표대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된 김원봉은 당권을 장악하고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바꿨다. 이로써 갈등은 심화되었다. 1937년 3월 청당(淸黨)과 당적제적 등의 갈등 속에서 지청천일파가 탈당하여 4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자, 김원봉의 조선의열단이 조선민족혁명당을 독점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루거우차오사변[蘆溝橋事變] 이후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인사들이 김원봉의 중간적인 좌경노선을 비판하며 탈당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였으며, 공산주의자 왕지연(王志延) 등도 재차 탈당함으로써 조선민족혁명당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김원봉 등은 이러한 당세의 약화를 만회하기 위하여 1939년부터 단일당운동을 제창하여 1943년 2월 제7차 전당대회에서 이전의 탈당분자, 청년전위동맹과 해방동맹이 합쳐 이루어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 · 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 · 조선혁명당 해외전권위원회 등과 당의 개조형식으로 합병하여 임시정부의 양대 정당의 하나가 되었다. 이들은 공 · 농 소자산계급을 당의 주요 기초로 하고 국민헌법 제정과 보통선거제 실시, 토지개혁 · 남녀평등, 그리고 민족자유 · 정치자유 · 경제자유 · 사상자유의 4대 자유에 입각하여 인류평화를 실현하는 신민주공화국의 건립을 표방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직은 대표회의 중앙집행위원회 및 그 예하의 각 부로 되어 있다. 각부의 책임자는 주석 김규식(金奎植), 총서기 김원봉, 비서처주임 신기언(申基彦), 조직부장 김인철(金仁哲), 선전부장 손두환(孫斗煥), 재정부장 성현원(成玄園), 통계부장 신영삼(申榮三), 미주총지부 주석 김강(金剛), 미주총서기 이경선(李慶善) 등이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해방자동맹 · 조선혁명자연맹 등을 규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은 조선의열단을 중심으로 1938년 연맹 산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의 항일투쟁 대열에 함께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1941년 이전까지는 대체로 임시정부의 반대입장에 서서 무시 또는 무관심의 태도를 가지고 취하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폴란드 · 네덜란드 · 프랑스 등의 망명정권의 수립과 임시정부를 한국인의 상징적인 정권으로 인정하여 지원하려는 중국 당국의 정책결정태도를 보고,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여, 1942년 10월 25일 제34차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선전부장 김규식과 학무부장 장건상(張建相) 2인을 임시정부에 입각시켜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1944년 4월 제36차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하는 4인을 입각시켜 임시정부 안에서 명실상부한 제1야당이 되었다. 이와 같은 좌우합작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 및 인도연락대(印度連絡隊)의 파견 등 많은 활동을 남기기도 했으나, 다시 임시정부 내부에서의 좌우의 파벌싸움에 따른 심각한 내부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당은 10월 10일 충칭에서 제9차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전국 통일적 임시연합정부건립을 주장하는 당면 강령 및 정책을 제정하였다. 그 해 12월 김규식 · 김원봉 · 성주식 · 김상덕은 중앙대표단의 명의로 환국하는 동시에 당 중앙부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1946년 3월까지는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4월부터 활동에 착수하여, 6월 말 김원봉을 위원장, 성주식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서울 및 지방에 지부조직과 상해 · 로스앤젤레스 · 하와이 등지에 총지부를 설치하는 조직결성에 노력하는 한편, 김원봉 · 성주식 등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참여하여 좌우의 통일합작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것이 실패하자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