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노농대중의 복리증진을 목적으로 무소속 국회의원 중 이훈구, 유홍렬, 김명동 등이 대한농우당 발기를 결의하고 추진하던 중 1948년 9월 4일 대한노총의 전진한, 동 혁신파 김구(金龜) 등이 대한농총 채규항과 함께 대한노농당을 발기하게 되었다. 발기준비위원은 무소속 국회의원 이훈구, 유홍렬, 김동명 외 41명, 대한노총측 전진한 외 20명, 대한농총 및 일반 유지 채규항 외 110명이었다.
대한노농당은 국회의원측과 노총, 농총 측과의 이념 및 비중 문제로 충돌을 빚어 결당식 당일인 10월 1일 유회되었다. 이에 농총, 노총측이 국회의원측과 결별하여 10월 9일 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발기인 약 200명이 모여 임시의장에 신동권, 채규항을 선출하였다. 채규항, 장예학 등은 대한노총과 대한농총을 기반으로 10월 24일 별개로 한국노농당 결당대회를 개최하고 최고위원으로 채규항, 전진한, 장예학을 선정하는 동시에 중앙위원으로 김병제 외 181명, 상무위원으로 김종률 외 34명, 감찰위원으로 채우제 외 19명을 선정하였다.
국회의원측은 이훈구를 최고비서로 한 대한노농당을 결성하고 40여명의 국회의원이라 발표하였으나 대중기반이 약하고 조직이 빈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49년 1월 이시영 부통령을 당최고 고문으로 추대하고 1949년 2월 대한노농당은 최고위원회를 열어 총무위원회차석비서 주상식, 상무위원회 수석비서 조종승, 농무위원회 수석비서 육홍균, 조사정보위원회 수석비서 유홍열, 차석비서 강봉서, 선전위원회차석비서 이기우, 특별상무위원회 수석비서 김영동, 차석비서 신광균 등을 선출하였다.
또한 대한노농당은 7월 국회내 단체교섭회 설치를 계기로 동성회 및 이정회의 간부급 국회의원인 신성균, 오택관, 류성갑 등을 포섭하여 그 소속의원으로 이훈구(李勳求), 이진수(李鎭洙), 김영동(金永東), 김중기(金仲基), 박우경(朴愚京), 김웅진(金雄鎭), 김익로(金益魯), 최운교(崔雲敎), 김동준(金東準), 조국현(曺國鉉), 조옥현(趙玉鉉), 오기열(吳基烈), 연병호(延秉昊), 차경모(車庚模), 권태욱(權泰郁), 이성우(李成佑), 백형남(白亨南), 박종남(朴鍾南), 류준상(柳俊相), 신성균(申性均), 오택관(吳澤寬), 류성갑(柳聖甲) 등 총 30명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1949년 11월 대한노농당의 일부 국회의원은 신정회, 일민구락부 등과 대한국민당에 흡수되었고, 대한국민당은 71석을 확보하여 국회 내 제1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