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룡·이주하 사건

  • 정치·법제
  • 사건
  • 현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남로당의 핵심간부 김삼룡과 이주하가 벌인 일련의 사건 및 체포 과정.
집필 및 수정
  • 집필 2013년
  • 윤상현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남로당의 핵심간부 김삼룡과 이주하가 벌인 일련의 사건 및 체포 과정.

내용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실패로 끝나고 미국에 의해 한국문제 UN이관이 선언되자 이에 반대하였던 남한의 공산주의계열은 1948년 이른바 2·27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선언한다. 이주하와 김삼룡 두 사람은 남로당 핵심당원으로서 공산당이 불법단체로 그 활동이 인정되지 않자 지하당으로 비합법적으로 활동하였다.

김삼룡은 체포되기 전까지 3년 동안 서울에 잔류하며, 남조선노동당 남한총책으로 북한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남한에서의 남로당 지하활동을 지휘하였다.

이주하는 남로당 정치국원으로서 일급 정치참모로 활약하던 중, 북로당과 남로당의 합당에 즈음 월북하였다가 김삼룡의 고문격으로 다시 남하하였다. 이들은 남한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남한단독총선거 저지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남로당원들의 활동에 대해 정희택(鄭喜澤)과 선우종원(鮮于宗源) 등이 주축이 된 수사진은 이들을 3년여 동안 추적한 끝에, 1950년 3월 27일 서울 예지동에서 이주하를, 이튿날 서울 아현동에서 김삼룡을 체포하였다.

김삼룡은 체포될 당시 엿장수로 가장하고 일곱 개의 색안경을 갖고 있었다. 세칭 ‘일곱 개의 얼굴’이라 불릴 정도로 변장에 능했다고 알려져있다.

김삼룡과 이주하는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1950년 6월 26일에 집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도 김삼룡과 이주하는 남침을 준비 중이던 북한공산집단에 의해서 위장평화공세에 이용되었다. 즉, 북한은 1950년 6월 10일 그들을 강제 억류중인 조만식(曺晩植) 부자와 교환하자고 제의해 왔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6월 16일 그 제의를 수락하였지만, 북한은 6월 20일로 교환일자를 일방적으로 연기하는 등의 지연술을 펼치다,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하였다.

참고문헌

  • - 『동아일보』(1951.1.30)

  • - 『동아일보』(1950.6.17)

  • - 『경향신문』(195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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