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2월 12일 “민족정신 앙양, 문화독자성 옹호” 등을 강령으로 하고, ‘반탁지지’와 ‘이승만 격려’ 등을 결의한 33개 문화단체들이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이하 문총)를 결성했다.
문총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 다음날인 6월 26일 남대문로 2가 문예사에서 긴급 문총상임위원회를 열었고, 정훈국의 권유로 문총 회장인 고의동과 모윤숙이 중앙방송국에서 시민 위무 강연을 했다. 구상, 박연희 등은 수원에서 ‘비상국민선전대(非常國民宣傳隊)’를 조직했으며, 28일 아침 한강을 도강해 대전까지 내려간 문인들이 비상국민선전대를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로 확대 개편했다. 여기에 참여한 문인들은 조지훈, 구상, 서정주, 이한직, 박목월, 김송, 임긍재, 박화목, 이정호, 서정태, 조흔파, 김윤성 등이었으며, 국군 정훈국(政訓局) 소속 하에서 활동했다.
문총구국대는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대구를 중심으로 지방의 문인들과 제휴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육군종군작가단, 해군종군작가단, 공군종군문인단 등으로 나누어 활동했는데, 육군종군작가단은 단장은 최상덕, 부단장은 구상, 김송이 맡았고, 정비석, 방영준, 장덕조, 최태응, 조영암, 양명문, 박인환 등과 작곡가 김동진 등이 가담했다.
육군종군작가단은 서부전선에 종군해 220회 종군했다. 대구 중심의 후방에서는 종군강연회, 시국강연회, 『전선문학』 등 기관지 및 전쟁문고를 발행했으며, 육군의 방송, 문학 및 음악의 밤, 시화전 등도 개최했다. 양명문이 작사한 「수도사단가」 등 군가, 부대가 등을 작곡하기도 했다.
공군종군문인단은 ‘창공구락부’라고도 했는데, 단장은 마해송, 부단장은 조지훈, 사무국장은 최인욱이 맡았고, 최정희, 박두진, 박목월, 유주현, 김동리, 황순원, 전숙희, 김윤성 등이 참가했다. 최인욱의 「날개춘향전」, 김영수의 「고향사람들」을 문인극으로 공연했고, 잡지 『창공』, 『사병문고』 등을 발행하고, 종군기를 『공군순보』 등에 발표했다.
해군종군작가단은 당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이 염상섭, 이무영, 윤백남 등을 해군사관학교 특별교육대에 입교시켜 사관생도 훈련을 받게 한 후 1951년 3월 1일 염상섭, 이무영을 해군소령으로 임관시켰다. 이에 박계주, 박연희, 윤금숙, 안수길 등이 해군종군작가단을 구성해 초대 간사 박계주, 2대 간사 박연희 등의 책임하에 군함정을 타고 종군 활동을 했다.
문총구국대는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정훈국 편집실장 김기원 소령과 더불어 서울로 돌아와 1950년 10월 1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민족문화인총궐기대회’를 개최해 사명을 완수했음을 선언하고 자진 해체하게 되었다.
한편 동년 10월 초 유엔군과 국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문인들은 다시 정훈국과 제휴해 유치환, 오영수, 홍영의, 박용덕 등이 동부전선으로, 최태응, 조지훈, 오영진, 박화목 등이 평양방면으로 종군을 자원했다. 다시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전선이 남하하자, 평양방면에 종군했던 오영진, 조지훈 등은 평양에서 결성한 ‘북한문총’ 문인들과 남하했다.
1951년 1·4후퇴당시에는 한국전쟁 초기와 달리 대부분의 문인이 대구와 부산으로 피난했고, 대구에 다시 모인 문인들을 중심으로 공군과 육군으로 나누어 각각의 종군문인단을 결성했다. 이들 종군문인단은 1953년 휴전 시까지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