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보안법 파동’.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었으나,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던 진보당의 조봉암은 200여만표를 얻었고 1957년 전국적으로 지방조직을 확대하는 등 4대 총선을 겨냥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에 1957년 11월 22일 이근식 내무부장관은 “우리나라 주권을 무시한 평화통일론자”를 처단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입안 중이며 평화통일을 주장한 정당을 내사 중이라는 중대발안을 하였다. 그리고 1958년 1월 12일 ‘평화통일구호 및 간첩 박정호와의 접선혐의’로 진보당 당수 조봉암 및 간부들을 체포했다.
또한 1958년 2월 16일에는 KNA여객기가 김순기, 김택선, 김형, 최관호, 기덕영, 박명익 등에 의해 북으로 납치되었다는 정부발표가 있었다. 이 KNA 납북사건을 계기로 자유당 정부는 불온사상에 대한 내사와 반국가적 행동에 대한 단속요강을 발표했다.
한편 이러한 경색된 분위기에서 1958년 5월의 민의원선거를 앞두고 자유당과 민주당은 각각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여, 결국 1958년 1월 서로의 이해를 절충한 이른바 협상선거법(協商選擧法)이라고 불리는 선거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민주당은 소선거구제 및 선거구 증설, 무소속과 군소정당에 타격을 줄 입후보금기탁제(立候補金寄託制) 등에 자유당과 이해가 일치하였으므로 민주당이 강력히 요구하고 있던 선거참관인의 확대를 선거법 개정에 포함시키는 대가로 선거공영제(選擧公營制)와 언론규제 조항의 삽입을 양보하였다.
이러한 협상선거법의 언론보도제한규정에 대하여 언론인은 위헌이라고 반대하여 한국신문인협회는 반대성명까지 냈으나, 민주당은 눈앞의 이익에 따라 비밀협상에서 자유당이 요구한 이 언론제한 조항을 용인하였다.
협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1958년 5월 2일의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의 의도대로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으로 무소속과 군소정당이 큰 타격을 입었다. 제4대 민의원선거 결과 민주당이 무소속과 군소정당의 퇴조로 득을 본 반면, 자유당은 총 233의석 가운데 126석으로 개헌 추진을 위한 2/3의석 확보에 실패했을뿐 아니라 서울 16개 선거구 중 단 1석만 당선자를 내는 등 여촌야도(與村野都)현상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였다. 또한 부정선거에 대한 소송이 105건, 당선무효 3건, 8건의 재선거가 이루어졌다.
자유당의 이러한 정치적 위기는 진보당의 정당등록취소, 8월 『사상계』의 함석헌, 『코리아타임즈』의 장수영, 『동아일보』 최원석 기자의 구속 등으로 이어졌다.
자유당은 다가올 1960년 차기 정·부통령선거의 선행책으로 야당의 언론제한을 주제로 하는 신국가보안법(新國家保安法)을 구상하고 야당측이 고집하는 내각책임제개헌공작을 봉쇄함과 아울러 대공사찰을 강화할 것을 기도하였다. 자유당은 국가원수 명예훼손 엄벌과 범법자의 언론기관취임자격 박탈 및 공무원의 반항·선동도 엄벌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였는데, 이 법안은 ① 간첩죄의 극형, ② 간첩방조자에 대한 중죄, ③ 변호사접견금지 및 2심제도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의원들은 간첩개념확대규정은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대통령 출마의 봉쇄와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려는 것이며, 변호사의 접견금지 및 2심제 폐지는 위헌이라고 전면으로 반대하였다.
여기서 이러한 검찰실무자들의 보안법 개정시안의 무수정을 고집하던 자유당은 보안법안을 철회하고 다시 협의한 결과 언론관계 조항을 삽입하여 처벌이 강화된 새로운 국가보안법개정안을 마련, 1958년 8월 5일 다시 국회에 제출하였다.
전문 42조인 이 개정안의 골자는 ① 보안법 적용대상의 확대: ‘북괴지령에 의해 운영되는 단체’에서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집단 또는 단체의 조직’, ② 이적행위개념의 확대: ‘군사상의 비밀탐지’에서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국가의 이익이 되는 모든 정보의 수집’, ③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결사 또는 집단의 지령을 받고 그 목적한 사항의 실행을 협의, 선전, 선동하거나 또는 그 이익을 위하여 동일한 사항을 선전, 선동하는 행위의 처벌규정 신설, ④ 군인 및 공무원의 반항·선동행위 처벌규정 신설, ⑤ 헌법상기관의 명예훼손행위에 대한 처벌규정 신설, ⑥ 사법경찰관의 조서를 증거능력으로 인정하여 구속기간 연장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⑦ 「국가보안법」피고인이 보석될 경우 즉시 항고할 수 있게 하고, ⑧ 군정보기관의 간첩수사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 ⑨ 보안법 범법자에 대한 취임자격 박탈에 교육기관과 보도기관 추가 등이었다.
1958년 11월 8일 정부는 이 개정안에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적시 또는 유포함으로써 인심을 혹란하게 하여 적을 이롭게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언론통제 조항을 추가하였다.
마침내 정부는 1958년 11월 18일에, 8월 9일자로 제출한 국가보안법을 철회하고, 더 강력한 「국가보안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심의를 요청하였다. 사실 이 법안은 국가기밀, 명예훼손, 경찰조서의 증거력인정, 자격정지, 허위사실의 유포 등에 관한 것으로 인권침해의 우려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방대한 내용이었다. 이 국가보안법개정안이 국회에 제안되자 먼저 1958년 11월 21일 한국신문편집인 협회에서도 이 법안의 언론관계 조항이 언론의 자유와 인권보장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반대를 명백히 하였으며, 대한변호사협회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건의서를 보내 이 법안이 적용범위가 광범, 모호하며,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법조항이 있고, 소송절차를 무시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일제의 「치안유지법」보다 독소조항이 많아 수사기관의 언론검열을 사실상 인정하는 언론탄압 조항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1958년 11월 23일 민주당에서도 반대성명을 발표하여 “정부가 제출한 「국가보안법」안은 공산분자를 더 잡을 수 있는 이점보다는 언론자유를 말살하고 야당을 질식시키며 일반의 공사생활을 위협할 해점이 심대하다.”고 지적하였다.
민주당에서는 이 법안의 문제점으로 ① 이 법안은 헌법상의 기관에 대한 명예훼손을 엄벌하는바 정치비판의 모든 길을 봉쇄할 것이며, ② 국가기밀과 정보의 개념을 군사뿐만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확대하여 국민생활의 거의 전 영역을 처벌대상으로 하였는 바, 아무리 총력전이라 하더라도 사회와 문화의 영역까지를 군사기밀이라 하여 엄벌해서는 안 될 것이고, ③ 이 법안은 경찰·헌병·특무대 등에서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하여 자백을 받기 위한 고문을 장려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며, 사법경찰관의 구속기간의 연장, 보석허가와 보석명령에 대한 효력을 정지시키는 즉시 항고제도의 신설은 국민의 신체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점, ④ 허위사실의 유포, 적시, 그리고 사실의 왜곡, 적시에 관한 조항은 오늘날 법운영상의 기형적 현실로 미루어 보아 언론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 법안 반대를 위하여 투쟁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그런데 1958년 10월에 이미 자유당은 신보안법안의 연내 무수정통과방침을 결정하였으며, 개정의 관철을 위하여 무소속의 장택상(張澤相) 의원을 포섭하여 반공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또한 차기 정부통령 선거를 위해 정부통령선거법, 지방자치법, 국가보안법의 운용을 위한 중앙조사국의 설치, 경찰집무법의 개정 등 각종 개헌의 연내통과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11월 27일 보안법 개정을 저지하기 위한 원내조직으로 국가보안법개악반대투쟁위원회와 원외조직으로 범야국민대회준비회를 구성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극한투쟁을 선언한 야당계의 전면 거부방침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은 연내 통과를 위하여 민주당측에서 마지막 타협조건으로 내세운 국방·내무 양 분과위원회에서의 병행심의를 요구한 것조차 무시하고, 원내에서의 반대투쟁을 저지하려는 목표 아래 법제사법위원회만의 단독심의를 고집하고 전후 10일간이나 야당의원들과 논쟁을 벌인 끝에 12월 5일 여당의원들만의 찬성으로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시키게 되었다.
12월 11일에는 제안 설명에 대한 야당측의 반박·난투극이 있었고 13일 회의가 속개되었으나 차이를 좁히지 못하여 타협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만 야당측에서 요구했던 일반인의 공청회가 12월 17일 형식적으로 열렸을 뿐이었다.
이 무렵 보안법개악반대투쟁위원회와 범야국민대회준비회는 보안법의 전면 거부투쟁을 위한 시위 준비까지 하고 있었으나 자유당은 이를 묵살, 법안통과를 강행하려고 하였다.
12월 19일 오전 조재천(曺在千) 의원에 의한 의사방해 발언이 있었으나 오후 3시부터 계속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의원들은 정각 오후 3시 3분 전에 출석하여 야당의원들의 지참(遲參: 지각하여 참석함.)을 틈타 단 3분 만에 모든 독회를 생략하고 신보안법안을 무수정 통과시키고 본회의에 회부하고 말았다.
자유당의원들의 기습작전으로 법제사법위원회 날치기 통과에 격분한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 80여 명은 이날 오후부터 국회본회의장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고, 범야 각 정당과 사회단체, 재야인사들은 1958년 12월 23일 보안법반대국민대회준비회를 구성, 규탄가두시위 등을 벌였다.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자 자유당내 온건파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일의 사태발생을 우려한 나머지 야당과의 협상을 추진하면서 어느 시기까지 냉각기를 갖기 위해 새해예산안의 선심을 조건으로 내걸고 타협을 모색하였으며, 또 민주당 내의 구파의원들은 신보안법안의 연내 통과를 저지하기 위하여 여야 쌍방의 뜻을 절충한 수정안을 내놓고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두 가지의 타협안 모두 양당 강경파의 입김에 눌려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자유당 강경파는 기정방침대로 무수정 통과를 주장하였으며, 민주당 신파는 전면거부의 극한 투쟁을 주장하여 야당의 농성투쟁은 계속되었다. 한편, 정부·여당은 야당의 국회 본회의장 농성사태에 대하여 ‘소수당이 타협을 거부하고 농성하여 국회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은 불법’이라고 반격하고 경위권을 발동하여 농성의원들을 축출할 것을 결정하였다.
당시 국회의 경위 수는 28명 밖에 안 되었으므로 정부는 국회사무처에 경위(警衛)를 300명으로 임시 증원할 것을 지시하고 전국 각지의 경찰관 중 태권도·유도·검도 등에 능숙한 무술경위를 차출, 경찰전문학교에서 이들을 훈련시켰다.
1958년 12월 24일 오전 국회의사당 주위는 무장경관들이 삼엄하게 에워싸고 있었고, 일반인들의 통행이 차단된 가운데 자유당의 한희석(韓熙錫) 국회부의장에 의하여 개회 직전 경호권이 발동되었으며,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야당의원들을 한 사람씩 축출하여 지하실에 연금시켰다.
이 과정에서 경위들에 반항하던 야당의원 중 김상돈(金相敦)·조일환(曺逸煥)·허윤수(許潤秀)·유성권(劉聖權)·전영석(田泳奭)·박창화(朴昌華)·구철회(具喆會)·윤택중(尹宅重)·김재곤(金載坤)·김응주(金應柱)·박순천(朴順天)·조일재(趙一載) 등 12명의 의원이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호권 발동하의 국회의사당 내에서 자유당의원들만이 남아 「신국가보안법」을 비롯하여 3988억 환 규모의 신년도예산안, 「지방자치법」 중 개정안 등 10여 개 법안, 12개의 각종 세법과 27개의 의안을 한희석 부의장 사회로 독회를 생략하고 2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이들 통과된 법안들 중 특히 「지방자치법」 개정안은 차기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선거제에서 임명제로 개정하여 관에서 임명한 각급 자치단체장을 선거운동에 동원함으로써 선거준비에 만전을 기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이러한 파동이 지나간 뒤 야당의원들은 2·4의결무효확인이라는 성명을 내며 제31회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으며, 한편 원외의 보안법반대국민대회준비위원회도 1958년 12월 30일 규탄성명을 발표한 뒤 1959년 1월 7일 시위계를 내고 대대적인 데모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 위원회의 간판을 강제로 철거시키고 정사복경찰을 동원, 포위경계망과 통행동결조치로써 제지하였으며, 또한 민주당에서는 정치훈련원을 졸업한 약 300명의 청년당원을 중심 부대로 약 3만 명의 서울시당원과 2,000여 명 정도의 지방당원을 대기시켜 놓고 민주당 당사에서 백남훈(白南薰)·고희동(高羲東), 민혁당(民革黨)의 신숙(申肅), 노농당(勞農黨)의 전진한(錢鎭漢), 무소속의 김팔봉(金八峰) 등 16명의 간부들이 철야회합을 갖고 시위방법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집회를 불허하는 한편, 경찰전문학교 학생 및 지방경찰관 500여 명까지 동원한 경찰망의 편성과 장갑차를 비롯한 각종 장비를 동원하여 시위 방지에 주력하였으며, 국민회(國民會)를 사주하여 애국단체연합회로 하여금 민주당에 대한 폭거규탄국민궐기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게 하였다.
그러나 반대시위도 치열하여 1월 7일의 국민대회준비위가 계획한 시위는 실패하였지만, 이날 미도파 앞 노상시위를 비롯하여 서울역 앞에서의 여자국민당 시위 등 수천 명의 시위대가 전단(傳單)을 뿌리며 거리로 나섰고, 대구·부산·청주 등 각 지방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으며, 중앙의 수십 만 학생들도 이에 호응, 경찰 제지를 무릅쓰고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야당은 원내에 민주구국원내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원외에서는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을 결성하여 투쟁방법을 전환하였으나, 1959년 1월 15일 「신보안법」 발효일을 고비로 잠잠해졌다. 그 뒤 야당에서는 농성중인 야당의원들의 축출을 계획한 인물과 특채된 무술경위의 명단만이라도 밝히려고 하였으나 모두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즉, 1959년 5월 19일 민주당의 윤명운(尹明運) 외 12명의 의원은 무술·채용 경위와 국고지출에 대한 국정감사를 실시하자는 긴급동의안을 제안하였으나 자유당측의 반대로 부결되고 말았으며, 뿐만 아니라 같은 날의 회의에서 민주당의 한근조(韓根祖) 외 13명으로부터 보안법파동에 대한 책임과 국회정상화를 기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이기붕(李起鵬)에 대한 의장직사퇴권고결의안이 제안되었으나 이것도 부결되고 말아 결국 이 파동의 책임은 당시의 사회자였던 한희석 부의장의 사퇴로 그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