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막새는 목조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이다. 삼국의 수막새는 연꽃무늬와 도깨비얼굴(귀면)무늬를 많이 제작하였다. 백제의 수막새는 ‘卍’자나 무늬 없는 수막새도 있다. 신라 수막새 중에 사람얼굴무늬가 새겨진 것이 하나 발견됐다. 고려 후기에는 원형돌기문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수막새의 형태에 큰 변화가 있다. 이전까지 수막새는 막새 부분과 수키와 부분의 접합각이 90°였다. 이 시기의 수막새는 접합각이 90°가 넘는 것이 많다. 수막새는 터만 남은 건물의 창건·중창 연도를 추정하는 자료로 활용된다.
수막새는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것이므로 보통의 기와, 즉 암키와 · 수키와에 비해서는 그 수량이 현저히 적다.
수막새의 사용은 중국의 전국시대에 민들어진 반원(半圓)수막새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구려 지역에서도 이러한 반원수막새가 출토된 적이 있다. 낙랑의 수막새는 고사리무늬와 ‘낙랑예관(樂浪禮官)’ 등을 비롯한 명문(銘文)수막새가 주류를 이루었다.
고구려의 수막새무늬는 4엽(葉) · 6엽 · 8엽의 연화문(蓮花文)이 많으며 잎이 뾰족하고 다소 생경하게 보이는 것이 많다. 백제의 수막새무늬도 역시 4엽 · 6엽 · 8엽의 꽃잎이 넓고 얕게 표현된 연화문이 많고 이따금 ‘卍’자 무늬와 무문(無文)수막새도 있다.
특히 백제의 수막새무늬는 일본의 아스카사(飛鳥寺) 창건와(創建瓦)와 거의 같기 때문에 당시 백제인이 일본에 기와 만드는 법을 전수하였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으며, 이는 옛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삼국시대 신라의 수막새무늬는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초기에는 고구려 · 백제의 무늬를 직접 모방한 것이 많고, 후기에는 양자의 특징이 혼합되어 신라화된 연화문이 사용되었다. 신라 수막새 중에는 단 한 점밖에 없기는 하지만 인면문(人面文)이 새겨진 것도 있어서 주목되고 있으며, 귀면문(鬼面文)수막새는 삼국 모두 많이 제작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이전까지 단순, 소박하던 연화문이 한층 변하면서 복판(複瓣) · 중판연화문(重瓣蓮花文)이 등장하여 도안예술(圖案藝術)의 극치를 보여 준다.
또한, 이 시대에는 연화문뿐만 아니고 쌍조문(雙鳥文) · 사자문(獅子文) · 가릉빈가문(迦陵頻伽文) · 기린문(麒麟文) · 비천문(飛天文) · 불상문(佛像文) · 귀면문까지 사용되어 매우 다양하고 화려한 면모를 과시하였다. 이와 함께 통일신라 초기부터는 녹유(綠釉)수막새가 제작되었으며, 타원형의 수막새도 사용되어 형태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고려시대의 수막새는 전 · 후기에 따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전기에는 기본적인 무늬가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것을 답습하는 정도였으나, 후기에는 일휘문(日暉文, 또는 蛇目文)이라고 부르는 원형돌기문(圓形突起文)이 주류를 이루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범자문(梵字文)수막새도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의 수막새는 대개 단순화되고 퇴화된 연화문이 장식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수막새의 형태 자체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전까지의 수막새는 막새 부분과 수키와 부분의 접합각(接合角)이 90°였으나 조선시대의 수막새는 그 접합각이 90°가 넘는 둔각형을 이룬 것이 많아서 주목되며, 이는 낙수 처리를 쉽게 하기 위한 형태였다고 생각된다.
이들 수막새무늬는 시기에 따라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 지금은 터만 남은 절이나 건물의 창건 및 중창을 포함한 존속기간을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또한, 수막새에 장식된 무늬 그 자체는 미술사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