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공화민정회는 1951년 5월, 제2대 국회에서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가 결합하여 구성한 교섭단체이다. 당시 국회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할 때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가 통합하여 70명의 신정동지회가 발족되었다. 신정동지회를 견제하기 위해 의석이 적은 민주국민당과 공화구락부가 제휴하였는데 민주국민당이 요직을 독점하였다. 공화구락부는 반이승만세력과 합동하려는 신정동지회와 결합하여 신당을 결성하려고 하였다. 이승만은 공화민정회에 원외세력과 합동을 제안하여 신당의 성격을 바꾸려 시도하였으나 합동이 결렬되었다. 이승만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공화민정회의 신당 결성을 방해하였다.
정의
1951년 5월, 제2대 국회에서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가 결합하여 구성한 교섭단체.
개설
공화구락부는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군간부들이 부정처분한 금품이 신정동지회의 정치자금으로 유용되었음을 폭로하고,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알려지면서 5월 9일 이시영 부통령이 원내외의 혼란을 수습할 수 없다며 사표를 제출하였다. 이에 후임 부통령선거에서 신정동지회에서 이갑성 의원을 지명하고, 민주국민당과 공화구락부가 합작하여 민주국민당최고위원 김성수를 지명한 결과 78대 73으로 김성수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민주국민당에서 국회의장, 부통령직 등 요직을 차지하자, 원내 다수석을 포섭하여 당건설을 준비하려는 공화구락부와 반이승만세력과 합동을 통해 대외적으로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신정동지회가 결합하여 5월 29일 공화민정회가 발족하였다.
연원 및 변천
기능과 역할
여기에는 30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하였는데, 권태욱, 이갑성, 김판석, 조대형, 안용대, 김종회, 박정근, 강경옥, 이재학, 오위영, 정문흠, 박철웅, 김형덕, 홍창섭, 조정근, 김정실, 박만원, 엄상섭, 양우정, 조경규, 이종영, 김용우, 송방용, 이도영, 태완선, 김영선, 정헌주, 오성환, 서장구, 김종순이었다. 공화민정회의 신당은 12월 23일 국회의사당에서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중앙위원회 부의장에 이갑성·김동성을 선출하고, 당명을 자유당으로 발표하고 자유당을 발족하였다.
한편 동년 12월 17일에 먼저 원외자유당이 이승만을 당수로, 이범석을 부당수로 추대하는 발기인대회를 개최한 바 있었다. 이대통령은 자유당은 하나밖에 없다며 이 원외자유당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양당의 분열이 격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대한민국정당사』(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9)
- 『국회사』(국회사무처위원국 자료편찬과, 1971)
- 『한국정당발달사』(이기하, 의회정치사, 1961)
- 『한국정당사』(한태수, 신태양사, 1961)
- 「제2대 국회내 공화구락부: 원내자유당의 활동에 관한 연구」(연정은,『사림』15,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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