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정화운동 ()

현대사
사건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벌어진 불교 내 자정운동.
이칭
이칭
정화운동, 정화불사
정의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벌어진 불교 내 자정운동.
개설

‘정화운동(淨化運動)’ 혹은 ‘정화불사(淨化佛事)’로도 불리며, 대체로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대처승의 배제, 비구승에 의한 종단 재건, 한국불교 전통 재건, 불교 근대화 운동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 내 자정운동이다.

이 운동의 직접적 계기는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전통불교사원에서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요지의 유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본래 대처승은 한국불교의 독신 전통과 달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승려들을 강제 결혼시키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은 우선 일본 불교의 대처승단 영향으로부터 한국 불교의 독신 승단 전통을 복원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역사적 배경

해방 직후부터 불교계 내에서는 교단개혁, 불교혁신, 불교개혁, 신불교 지향 등의 이름으로 다양한 자정운동이 있었다. 이때 불교혁신총연맹이 조직되고 선학원 등이 이에 참여했다. 불교혁신총연맹은 대처승을 교단 중심부에서 배제하고, 사찰의 토지를 토지개혁에 맞추어 소작인에게 분배하고자 했다. 이 혁신계열의 개혁운동은 교단 집행부와 마찰을 일으켜 이념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교단은 분열되었으며, 혁신은 진행되지 않았다.

경과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있기 전 몇 차례 불교 내부에서 승려들에 의한 자정운동이 진행되었다. 1952년에 수좌 이대의가 1949년 6월 공포된 농지개혁으로 인한 사찰경제의 위축, 이에 따른 수좌들의 생존 문제 등의 개선을 건의함으로써 통도사, 불국사 등에서 18개 사찰을 비구 수행 사찰로 양도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18개 사찰이 양도되지 않자 1953년 비구 수좌들이 선학원에 모여 시정을 모색했고, 바로 다음해인 1954년 5월 이승만의 대처승 축출에 관한 유시가 있자 비구승과 대처승 양측 간의 심각한 대결양상이 나타났다.

또한 종권과 사찰 경제권 문제로 승려들 간의 세력다툼에 대한 사회 우려가 높아갔다. 그러나 1955년 8월 12일, 13일 전국승려대회를 계기로 종권과 사찰 주도권이 비구승에게 넘어왔고 정부도 이를 공인하게 되었으며 1962년 4월 통합종단이 성립되었다.

결과

1962년 4월 비구, 대처 양측이 마침내 불교재건위원회에 합의하면서 재건비상종회를 구성하고 종헌을 제정 공포했다. 이에 따라 양측의 종단으로부터 종권을 인계받은 통합종단이 성립되었다. 통합종단에서 비구, 대처 양측의 대표가 간부가 되어 공식적인 종단운용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지만 6개월 후 대처측이 종회 구성의 형평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종단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통합종단의 근거가 공인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불교 정화운동 연구』(진관, 경서원, 2008)
『불교정화운동』1·2(김광식, 영광도서, 2008)
『불교정화운동의 재조명』(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조계종출판사, 2008)
「한국 현대불교의 개혁운동」(김경집, 『불교문예연구』2, 2014)
「한국 현대불교와 정화운동」(김광식, 『대각사상』7, 2004)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태동배경과 전개과정」(김인수, 『법회』36, 1988)
집필자
윤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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