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근호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강화린(姜華麟)
아명
강화인(姜和仁)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8년
사망 연도
1960년
본관
진주
출생지
함경남도 정평군
주요 경력
청산리 대첩 참전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1990)
관련 사건
반일학생사건|3·1운동|청산리 대첩|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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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강근호는 일제강점기,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다. 청산리 대첩에 참여하고 러시아로 넘어가 자유시사변을 겪은 후 반공 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다. 다시 만주로 돌아와 교육 활동에 종사하고 군사훈련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후에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소위로 임관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강근호(姜槿虎, 1888~1960)는 함경남도 정평군 출신으로 아버지는 강형석(姜亨錫), 어머니는 신해운(申海雲)이다. 부인은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시영(李始榮)의 증손녀 이정희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주요 활동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함흥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6년 ‘반일학생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촌〔龍井村〕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해 5월 신흥학교를 확대 개편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에는 무장 독립운동 조직인 북로군정서의 사관양성소에서 제1학도대 제3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제1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부대원들과 함께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1921년 6월 러시아 적군이 사할린의용대를 공격하는 자유시사변이 일어난 이후 고려혁명군에 소속되어 이르쿠츠크(Irkutsk)로 이동한 후 러시아 적군에 예속(隷屬)되었다. 그해 10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혁명군이 장교와 사병을 양성하고자 세운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22년에 반공 투쟁을 벌여 이르쿠츠크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서는 룽징촌 영신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3년에는 허룽현 명월구에서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수원의 대한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1949년 2월에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해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1956년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追敍)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 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논문

임경석, 「초기 사회주의들의 군사활동-고려혁명군을 중심으로-」(『국사관논총』 75,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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