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가을 회령에 사는 윤상철(尹相哲)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의 추수를 위하여 북간도 용정 신촌에 갔을 때,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이 신촌에서 먼 거리에 있는 용정학교에 통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조카 윤명희(尹命熙)에게 관리를 위탁하고 외가 생질인 김용근(金容根)을 시켜 민가 한 채를 사서 민족 교사를 모아 학생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이 학교의 시초였다.
처음에는 교명을 광성의숙(廣成義塾)이라 하고 30여 명의 어린이들을 입학시켜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북미에 거주하고 있던 함흥 출신 노민수(盧旻洙)가 간도로 오게 되어 그를 교장으로 추대하여 이끌게 하였다.
1912년에는 학교의 위치를 용정과 신촌 사이에 교통이 편리한 연길현 용지사육도구를 물색하기로 합의하여 학교를 기독교 중앙교회로 인계하였다. 그 해 11월에 교명을 영신학교라고 정식으로 이름 붙이고 기독교 정신을 실현함과 동시에 민족독립에 앞장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초대 교장에는 조희림(曺喜林), 제2대 교장에는 박예헌(朴禮獻), 제3대 교장에는 박걸(朴傑)이 각각 취임하였으며, 그 밖에 교사로는 강봉우(姜鳳羽)·장석함(張錫咸)·윤명희 등이 있었다. 당시의 교과목은 대부분의 교사가 기독교인이고 학교 운영방식도 기독교적임에 따라 신학이 주류를 형성하여, 신약전서·채플·찬송 그밖에 영어·역사·지리·한문·사민필지·작문·습자·체조·도화·산술·음악 등을 과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나자 이 학교의 학생들도 이에 적극 가담, 연일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그 뒤 항일 자주의식이 강한 학교로 지목되어 1920년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계기로 한때 폐교당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윤화수(尹和洙)가 교감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원상복구되어 1922년 3월에는 중학교까지 병설할 만큼 성장하였다. 1924년에는 흉년으로 인한 경영난으로 다시 폐교의 위기에 처하게 되어 교장 박예헌을 중심으로 학교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감 윤화수가 일본인과 결탁하여 학교를 인수, 운영하려 하자 간도는 물론 미국·일본·중국에서도 이들을 성토, 규탄하는 동포의 문서가 빗발치듯 하였다.
이러한 집단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1924년경 일본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었으며, 광명회(光明會)라는 재단을 설치하고 광명중학교와 광명여자중학교로 개칭, 운영하였다. 1938년 학제 변경에 따라 성립(省立) 제1국민고등학교로 개칭한 뒤 1945년까지 유지하였다.
이 학교는 일본인에게 넘어가기 전까지는 학생들이 학교 경영을 자발적으로 측면 지원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즉 생도 1인당 금1원 20전을 성금으로 희사, 헌납하였으며, 그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좁쌀 6두씩을 학교 운영에 보태도록 하여 어려운 학교 살림을 측면에서 적극 후원하였다.
비록 일본인에게 운영권이 넘어간 채 유지되어 왔으나 졸업생 대부분은 구국항일 광복전선에서 희생적으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