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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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에 창설된 대한민국 육군장교를 육성하는 4년제 군사학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46년 5월에 창설된 대한민국 육군장교를 육성하는 4년제 군사학교.
개설

1946년 5월에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가 같은해 6월 15일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로 개칭된 뒤, 정부가 수립되면서 9월 5일 현재의 교명(校名)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의 역사는 1945년 12월에 문을 연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와도 관계가 깊다.

1945년 11월에 공포된 군정법령에 따라 건군사업의 첫 걸음으로 국방사령부가 설치된 뒤에 부각된 당면 문제는 “군 간부를 어떻게 양성하느냐”였다.

사설 및 유사 군사단체와 광복군·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경력을 쌓은 수많은 자원들이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군사적 배경과 경력을 가진 그들을 하나로 통합 통일된 교육을 실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당시의 군 당국은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리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뒤 우선적으로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미 군정청(軍政廳)과의 협력을 원활하게 이루기 위한 통역관을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였고, 나아가 미래 국군의 창설에 대비한 간부 요원의 확보도 필요하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2000년 말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冷泉洞)의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게 되었다. 한국과 미국 양국인으로 구성된 교관단이 편성되어 선발한 60명을 대상으로 영어·국사·참모사(參謀史)·자동차·소화기(小火器) 과목 등을 교육하였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2월 27일태릉(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으로 이전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의 창설과 더불어 폐교될 때까지 약 110명(일본육사출신 12명, 학병출신 72명, 지원병출신 6명, 만주군출신 18명, 중국군출신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들은 교육 기간이 한 달 남짓한 단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입교 이전의 군사경력과 애국심 하나만으로 모든 난제를 극복하고 창건과 그 후의 군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내용

군사영어학교가 해체된 이튿날인 1946년 5월 1일에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학생 60명과 경비대 각 연대의 사병 중에서 2∼3명씩 선발된 28명 등 모두 88명을 제1기생으로 하여 조선경비사관학교가 개교하였다.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의 개교 기념일을 5월 1일로 삼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초대 교장으로 이형근(李亨根) 참령이, 부교장과 교수부장 및 생도대장으로 장창국(張昌國) 부위가 각각 취임하였다.

이 때부터 군사관련 과목에 대한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전술훈련과 지휘통솔법 과목을 보강하는 등 조선경비사관학교는 정규 사관교육을 지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기 직전까지 배출된 제1기에서 제7기까지 약 1,800여 명의 사관후보생들은 기별에 따라 최단 45일부터 최장 6개월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 임관되었다.

이 기간 중 입교한 대부분의 사관후보생들은 과거에 군사 경력이 있던 사람들이거나 현역 가운데 선발되었기 때문에 짧은 교육 기간에 비해 교육 성과는 상대적으로 컸었다.

제1기생 88명은 대부분 군경력자들이었기 때문에 45일간의 단기교육으로 임관되었으나 제3기생부터는 교육기간이 3개월로 되었으며, 제5기생과 제7기생은 민간인 출신이어서 신병 교육훈련이 교육기간의 반 이상이 소요되어 교육기간이 6개월에 이르렀다.

경비사관학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즉 1948년 9월 5일 국군의 창설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면서 교육기간이 다소 연장되었다. 실제로 제8기는 22주, 제9기는 23주의 교육훈련을 각각 받았다.

교육 내용도 점차 내실을 기하게 되어 제식훈련·화기훈련·기본 전술훈련 외에 국사·영어 등의 일반학 비중도 점차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6개월에 이르는 교육훈련이라 할지라도 그 질은 객관적인 측면에서 볼 때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따라 군 당국에서는 교육과정을 4년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정규장교를 육성하자는 안을 구상한 뒤 이를 제10기생 때부터 적용하려 방침을 세웠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에 제10기생 또는 생도 1기는 2년제 과정으로 모집되었지만 이들도 입교 후에는 또 다시 1년간의 교육훈련으로 그쳤다.

이 무렵 경비사관학교라는 교명 아래 모집되어 교육받고 있던 제7기와 육사로 개칭된 후의 제8기에는 특별반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는 그 당시까지 군에 입대하지 않고 있던 해외 군사경력자들을 입교시켜 단 기간의 교육을 이수시킨 후 임관시키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였다.

한편, 1950년 6월 4년제 정규과정으로 생도 2기생이 입교하여 대망의 정규 사관교육이 시작되는 듯하였으나 6.25로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전쟁 발발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에 임시 휴교 조치되었다. 졸업을 1주일 앞두고 있던 생도 1기와 4년 과정으로 입학한 지 20여 일밖에 안되었던 생도 2기의 재교생들은 생도 신분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포천 부근의 부평리 전투를 비롯하여 갈매리전투, 광나루전투 등 모두 여덟 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전쟁 중에 살아 남은 1년 과정의 생도 1기는 1950년 7월 대전에서 육군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생도 2기는 같은 해 8월 부산에 설치되었던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되어 종합 1기와 2기로 나뉘어진 채 임관한 후 전선에 재투입되었다.

국군과 더불어 남하하였다가 1951년 10월경상남도 진해에서 4년제 대학과정으로 재 개교한 육군사관학교에는 제11기 생도가 입교하여 육사의 전통을 다시금 계승하게 되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미국의 육군사관학교를 모델로 하여 학교를 편성하였기 때문에 교육제도는 물론 그 운영에 이르기까지 거의 미국식이었다. 우선 이과(理科) 과목을 위주로 교육과정이 편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육사의 테이어 제도[Thayer system]로 알려져 있던 교육방식 아래 일일시험, 장말시험(章末試驗), 그리고 기말시험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체계적인 평가방식은 전쟁 중이라는 당시 상황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제도로 육군사관학교가 국내에서 가장 엄격한 학사제도를 운영하는 측면을 낳게 하였다.

육군사관학교는 1953년 7월 휴전과 더불어 전선의 국면이 안정되자 이듬해 6월에 태릉으로 복귀하여 새로운 교육환경을 준비하게 되었다. 교육시설의 확충, 교육제도의 개혁, 교육내용의 강화와 더불어 생도대 생활도 새롭게 변모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학교 설립의 법적 근거인 <사관학교설치법>이 1955년 10월에 공포되면서 육군사관학교는 수업 연한이 4년인 대학과정으로 인정받게 되어 졸업생에게는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수여함과 동시에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태릉은 서울의 동북 방면에서 시내로 향하는 주요 접근로를 감제할 수 있는 불암산과 수락산을 끼고 있어 군사작전상 요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일제강점기 일본군 당국은 지원병 훈련소를 이곳에 설치했었고,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국방경비대의 제1연대 A중대가 기존 시설을 바탕으로 주둔했었다.

태릉이 이렇듯 그 나름의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지만 1957년 3월 당시 교장이었던 백남권(白南權) 장군이 지명의 개칭을 논의케 하였다. 국민의 여망을 담은 육군사관학교가 민족적 전통이나 화랑 후예의 기상을 닦는 국방의 요람지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화랑대’라는 명칭이 적합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를 계기로 화랑대의 육군사관학교는 명실공히 학교임무와 시설, 그리고 환경이 육군의 요람이며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의 고향으로 키워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변모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연병장을 축조하고 가건물인 콘셋트 막사를 현대식 철근 막사로 바꾸며 학교의 환경을 일신해 나아갔다.

1958년 5월 새로 다진 연병장을 화랑연병장으로 명명했다. 같은해 11월에는 각종 운동 경기가 가능한 1만 8000여 평 규모의 제3체련장(구 C 연병장)이, 12월에는 주위 전답을 매립하여 7,000여 평 규모의 축구 및 럭비 전용구장(구 F연병장) 등이 축조되었다.

수준 높은 일반학 교육을 위해 각종 실험실도 이에 못지 않게 마련되었다. 1955년에는 200평 규모의 블록 연와조 건물로 강전 및 약전 실험실과 기재실 및 교수실을 겸비한 전기공학 실험관이 준공되었다.

1957년 9월에는 역학실험실이 준공되어 수리공학(水理工學) 및 열공학(熱工學) 실험 등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국내에서는 최초의 실험실습장으로서 생도교육의 환경과 연구 분위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58년 3월에는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전우들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미8군 장병들이 모금한 19만 달러로 건립한 단층 슬래브 도서관 건물이 개관되어 국내 최초로 개가식으로 운영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생도 내무반이, 그리고 12월에는 전 생도들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 준공되었고, 곧 이어 병원시설, 교육 지원부대인 근무지원단 막사, 성당 등이 순조롭게 건축되었다.

1961년에는 미국의 원조로 59석의 최신 어학실험실이 건립된 것을 비롯하여 1960년대 초부터 말기까지 실내체육관·수영장·군마장(軍馬場)·골프장·오락관인 양지관(養志館), 세탁소·교회·법당·생도회관 등 거의 모든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기존의 건물을 보수하여 사용하던 종합교실 건물을 3층 철근 콘크리트 교사로 신축하면서 시청각교실과 전산실, 어학실 및 교수연구실 등을 확충하였고, 생도 모집인원의 증가에 발맞추어 생도 내무반을 새로이 증축하고 대강당을 완공하였으며, 아울러 학교의 교직원들의 주거지인 관사와 아파트도 신축되었다.

이처럼 육사가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제반 교육시설이 괄목할만한 수준에 이르게 되자 교육환경 혹은 휴식공간이라는 개념으로도 관심을 넓히게 되었다.

학교 전체를 하나의 공원처럼 단정하게 꾸미기 위해 다소 산만하게 배치된 시설물과 주변 지형물과 조화를 고려해 각종 군사 기념물과 기념탑을 건립하였고, 더 나아가 수목도 단정하게 정리하였다. 이제 화랑대는 역사적인 교훈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화랑의 후예를 위한 교육의 도장으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다.

물론 1970년대 말기부터 1980년대 초기에 이르는 동안에도 많은 건물들이 신축되었다. 학교 본관 건물을 신축하여 구 본관 건물의 일본식 군대의 잔영(殘影)을 말끔히 씻어버렸다.

이공학 분야의 첨단과학 실험실과 기자재를 설치한 익양관(翼襄館)과 군사관련 과목의 수업과 실습을 전문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흥무관(興武館), 그리고 도서관 등이 증축됨으로써 최소 15명 내외의 소규모 단위의 강의와 실험이 가능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세미나실·소강당·중강당·대강당에서는 다양한 규모의 교육 및 강연 활동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종합 교육이 자유롭게 이루어 질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 교육환경의 외형적인 완비와 더불어 꾸준히 발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능한 교수진의 확충 및 전문화와 교과과정을 포함한 사관학교 나름의 교육제도의 정착을 위한 노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교육환경 및 교육제도의 개선, 우수한 생도의 모집 등과 함께 꾸준히 개선과 향상을 거듭해 온 또 하나의 분야는 우수한 교수진의 확충이었다.

진해에서 4년제로 개교했을 당시에는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피난 차 부산 등지에 내려와 있던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의 각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초빙하여 질적으로 우수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으나 태릉으로 복귀한 뒤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졸업생 중에서 우수자를 선발하여 국내외에서 민간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이수케 하여 교수로 충원하는 제도를 모색하게 되었다.

교수로 오는 이들 졸업생들은 현역 장교임과 동시에 교수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 자격과 보임, 경력관리·진급 등 신분에 관한 문제가 있었지만, 1968년 7월에 공포된 <일반학 교관 인사관리규정>과 그 이전의 <군인사법>(1962), <군인보수법시행령>(1966)과 1970년에 시행된 <군인사법시행령> 등으로 교수 인사에 관한 문제가 해소되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교수를 양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특수 과목인 독어·불어·스페인어·노어·중어·일어 등 제2외국어와 법학에 대한 소요 교수를 충원하기 어려웠다. 또한 육사출신 교수가 전체 교수단의 70% 이상을 상회하자 교육내용과 수준의 결정에 편견이 초래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학교는 이러한 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1965년부터 일반대학원 출신자 중에서 우수자를 선발하여 중위로 임관시켜 3년간 육사에서 교수로 근무케 하는 이른바 특수간부후보생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와함께 1976년에 확정되었던 학교발전 5개년 계획사업으로 현직 교수의 재교육 계획이 시행됨에 따라 본교는 국내 최고수준의 교수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육사는 유능한 교수를 어떻게 충원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면서 교수들의 계속적인 연구 활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연구실 및 연구소의 설치 문제에도 관심을 두었다.

1964년에 한국군사연구실이 발족되었다. 우리 나라의 군사문제를 연구 발전시키는 데 기틀을 놓은 이 연구실은 1974년에 인문사회과학연구소로 확장되었다.

1973년 4월에는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방위산업에 일익을 담당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응용과학연구소도 설치되었다. 1981년 7월에는 이러한 각종 연구실을 통합하여 화랑대연구소로 발전되었다.

산하에 10개 연구실을 갖춘 현대식 연구소로 탈바꿈을 해오던 중 1988년 10월에 정식으로 학교 편제로 인가되어 군 연구소로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군 관계 용역연구는 물론 교수들의 개인 연구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교육과 동시에 연구활동을 연계하는 교수 기능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육군사관학교는 일반학 교육을 위한 우수 교수진의 확보에 못지 않게 중요시되는 훈육관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일반 대학과는 다른 전인교육의 기틀을 공고히 다져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다져갈 것이다.

의의와 평가

21세기를 맞아 육군사관학교는, 세계화와 정보화 추세에 부응하여 미래 전장을 주도할 수 있는 군 인재 양성을 위해 야전과의 연계성을 제고하고, 전공과정을 심화하여 장차 군사전문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고, 생도들의 과다한 학습부담을 경감시켜 더 많은 자율학습 시간을 부여하며, 교과목간의 경쟁적 발전의 동기를 부여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50년사』(육군사관학교, 1996)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30년사』(육군사관학교, 1978)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백봉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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