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7월 20일 간첩 및 간첩활동자 일당 27명이 당국에 구속되고, 관련 수배자는 118명에 이르렀다. ‘임자도간첩단’ 관련자들은 고기잡이를 가장한 뱃길을 이용하여 1962년부터 6년간 연 13회에 걸쳐 북한을 내왕하면서 공작지령을 받고 공작금 1845만 원을 수령하였다.
월북하여 북한의 공작지령을 직접 인수해 온 정태홍(鄭泰弘) · 최영길(崔永吉) · 김종태(金鍾泰) · 윤상수(尹相秀) 등은 북한의 무력혁명에 대비하여 봉기할 후방 유격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하고, 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후방기지로서의 구실을 수행하기 위해 임자도를 그 기지로 설정, 일찍이 1961년도부터 비밀리에 맹렬히 활동해 왔다.
이들은 목포와 서울에 동방수지공업 · 동성서점 · 삼창산업 등 3개의 위장업체를 운영하면서 연락 근거지로 삼는 한편, 월간지 『청맥(靑脈)』을 통하여 학생층의 사상을 적화하는 데 힘썼다. 『청맥』은 두 차례에 걸쳐 월북하여 공작금 800만 원을 수령해 온 김종태가 창간했다가, ‘통일혁명당’의 핵심이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출신인 김질락(金礩洛) · 이문규(李文奎) 등에게 편집 및 운영을 넘겨주었다.
최영길은 임자면의 전 면장으로서 임자도의 공작기지 관할을 책임졌다. 주범 정태홍은 6 · 25전쟁 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중 탈옥하여 전후 4차에 걸쳐 북한을 내왕하면서 공작지령(A3암호통신)을 15회나 접수하였다.
이들 간첩단은 정당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전 대중당(大衆黨) 대변인 김인달(金仁達, 가명)과 전 대중당 조직부원 김학룡(金學龍)을 포섭, 모 혁신당의 당수를 사퇴시키는 공작에 참여하게 하고, 무안군 안좌국민학교장 박신일(朴信一)을 포섭, 북한의 암호통신을 수령하게 하는 등 각계각층에 파고들었다.
당시 임자도에는 이들 간첩단의 활동을 고발할 수 없을 만큼 기지화된 조직의 보이지 않는 세력이 막강하였고, ‘통일혁명당’의 월북 루트로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간첩단이 그 동안 북한으로부터 받은 지령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① 남로당조직을 재건하여 지하당조직을 확산할 것, ② 사회주의자 서클을 조직할 것, ③ 공작조직의 간부를 양성할 것, ④ 혁신계 등 중도 정치노선의 정당에 침투할 것, ⑤ 1967년 5월의 대통령선거에는 제1야당을 지원하고 모 혁신 정당의 당수를 사퇴시킬 것, ⑥ 1967년 6월의 국회의원선거에는 극렬적인 야당 인사를 지원할 것, ⑦ 지하당은 장차 유격대로 발전시키고 이에 대비하여 도서지역에 유격기지를 설정할 것, ⑧ 출판사를 경영하되 장기적인 안목으로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반미 · 반정부 사상을 고취시킬 것, ⑨ 「반공법」 · 「국가보안법」 사건을 주로 맡는 변호사를 적극 포섭할 것 등이다.
임자도간첩단은 통일혁명당과 쌍둥이 지하당이라고 할 만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비밀리에 맹활약, 그 잠복기간이 장기적이었고 대규모였다는 데 특징이 있다. 간첩들은 모두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이듬해에 사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