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 ()

대동여지도 중 전라남도 함평, 무안, 목포 부분
대동여지도 중 전라남도 함평, 무안, 목포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전라남도 남서단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시.
정의
전라남도 남서단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과 남쪽은 영산호(榮山湖)에 면해 영암군을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은 많은 도서들로 이루어진 신안군, 북쪽은 무안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17'∼126°26', 북위 34°44'∼34°49'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50.65㎢이고, 인구는 23만 838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3개 행정동(64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전라남도 목포시 용당동에 있다.

자연환경

무안반도 남단에 위치하며, 동쪽에 입암산(笠巖山, 121m), 서쪽에 유달산(儒達山, 228m), 북쪽에 양을산(陽乙山, 156m)·대박산(大朴山, 156m)·지적봉(芝積峰, 189m) 등으로 둘러 있고 남쪽은 영산강 하구에 면해 있다. 또한, 그 주위에 13개의 도서가 넓게 펼쳐져 있어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방파제 구실을 하여 천연적인 양항의 조건을 보인다.

시가지의 서남쪽에 병풍을 둘러놓은 듯 기암절벽이 펼쳐진 유달산은 고려시대인 1351년(충정왕 3)에 봉수대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가 쌓여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일명 노적봉(露積峰)이 있으며, 영산강·삼학도(三鶴島)와 함께 이곳 사람들의 시정(詩情)을 돋우는 아름다운 경관을 갖추고 있다. 삼학도는 1968년 이후 목포와 연결되면서 자연이 크게 파괴되어 과거의 정취를 잃고 말았다.

노령산맥에서 시작되는 영산강은 나주평야를 지나 목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시가지 주변의 영산강 하구에는 연변·북항·대반동·백련동·갓바위해안 등의 간석지가 있다. 이들 간석지는 육상으로부터의 계속적인 퇴적과 바닷물의 유입횟수가 줄면서 정착하게 된 염생식물 덕분에 퇴적물의 집적과 간척이 용이해져 농경지·주택지·공장부지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영산강 유역은 강수의 편의율(偏倚率: 치우치는 정도)이 대단히 커서 매년 상습적인 한해(旱害)·홍수 등의 피해가 빈번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영암군 삼호반도(三湖半島)와의 사이에 하구둑이 축조되어 영산강은 영산호로 변하였다. 해안선 길이는 66.9㎞이다.

도서로는 고하도(高下島)·눌도(訥島)·달리도(達里島) 등 6개의 유인도와 5개의 무인도를 포함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4℃이고, 1월 평균기온 1.0℃, 8월 평균기온 26.1℃이며, 연강수량은 1,483㎜이다.

역사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청동기시대 및 철기시대의 유적·유물로 동검이 시 부근에서 출토되었다. 근초고왕 때 백제에 병합된 뒤 물아혜군이라 하였고, 신라의 경덕왕 때 무안군으로 개칭되었다.

뒤에 견훤(甄萱)이 무주에서 거병하여 후백제를 건국했을 때는 후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909년(효공왕 13) 왕건(王建)이 수군을 이끌고 와 이 지역을 점령한 뒤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지방까지 장악함으로써 왕건의 지배영역에 들어갔다. 이때 나주의 남쪽 포구라 하여 이곳을 남포 또는 남개라 하였다.

후일 이것이 나무개로 변했다가 다시 목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고, 또는 지형이 마치 목처럼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에 목개라 부르던 것이 한자로 옮겨지면서 목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남포 또는 목포라 불리던 지역은 지금의 영산포 부근으로 비정되고 있다.

944년(혜종 1)물량군(勿良郡)으로 고쳤다. 991년(성종 10) 다시 무안군으로 부르게 되었으나 나주군의 영군으로 예속되었다. 1172년(명종 2)에는 감무를 두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해안지역이 모두 왜구의 피해를 입게 되면서 그 대비책으로 1391년(공양왕 3) 성산극포권농방어사(城山極浦勸農防禦使)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 중 극포방어영이 조선 초기에 중요한 수군진영으로 변모하면서 목포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397년(태조 6) 군사단위인 도를 폐지하고 연해지역의 거점이 되는 지역에 진을 설치했는데, 목포는 이때 전라도에 설치한 4진 중 하나가 되었다. 목포진에는 첨절제사가 파견되어 방어 임무를 맡았다. 태종 때 초기의 진이 개폐된 뒤 세종대에 정비된 진에는 목포가 포함되지 않았고 단지 수군영만이 존치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목포진의 병력은 전선 8척, 선군 490명으로 다른 수군 만호영과 비슷한 규모였다. 후일 전라도의 수군이 좌·우수영체제로 되었을 때는 함평의 임치도(臨緇島) 진관에 소속하게 되었다.

예하에는 고하도·비금도·팔금도·도초도·기좌도·안창도·자은도·장산도·하의도·암태도·우이도·흑산도 등 12개의 섬을 관장하였다. 1597년의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李舜臣)이 목포 앞바다의 고하도에 진을 세우고 군량을 비축해 조선작업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 관제개혁으로 인해 무안군에서 분리되었다. 목포만호청을 설치, 외국인의 거주와 무역을 허락했고 1897년 10월에 개항하면서 목포진 또는 목포항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 목포감리서(木浦監理署)가 설치되어 외국영사관에 대해 우리나라의 지방·외교 사무를 맡게 했는데 감리는 무안부윤이 겸임하였다.

1903년 감리를 따로 두고 무안부를 무안군으로 다시 칭하게 했다가 1906년무안군을 무안부로 승격시키면서 감리를 폐하여 무안부윤이 이를 맡도록 하였다. 1910년무안부를 개칭, 목포부라 칭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무안군과 목포부를 분리함으로써 별도의 목포부가 처음으로 독립되었다. 이해 서울∼목포간 호남선 철도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4월에 박상렬(朴相烈)·박상술(朴相術)·박상오(朴相五) 형제와 오재복(吳在福)·이금득(李今得) 등이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1934년 김기진(金基鎭)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청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32년무안군의 이로면지역을 병합했으며, 당시의 인구는 6만으로 전국 6대 도시의 하나로 급성장하였다.

1948년 일본식으로 된 지명을 우리나라 지명으로 고쳤다. 특히, 목포는 개항 후 일본인의 거류지로 지정되고 발전했던 만큼, 대부분의 동 명칭이 일본식 정명으로 되어 있었다. 1949년 지방자치법의 시행에 따라 목포시로 개칭되고 1952년 시의회를 구성하였다.

1963년에 무안군 이로면 산정리·상리·용당리·달리·눌도리가 목포시에 편입되고, 1970년에 산정1동에서 연동이 분동되었다. 1973년에는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가 목포시 이로동에 편입되었다. 1979년에는 용당동이 1, 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7년에 무안군 삼향면 대양리·옥암리가 목포시에 편입되었다. 이때 석현동 일부와 대양동·옥암동을 합해 삼향동이 설치되었고, 1994년에는 이로동이 용해동·상동으로 분동되었다. 1997년에는 29개 행정동을 26개로 정리하였다.

또한, 삼학도와 갓바위를 잇는 지역을 매립하는 등, 현재 전시역의 3분의 2가 매립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립작업에 의한 시역의 팽창이 계속되어 왔다.

유물·유적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석현동의 고인돌을 비롯해 시내에서 출토되었다는 동검 등이 있다.

성지로는 일명 목포대(木浦臺)라고 하는 안호성지와 유달산성지,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관련 있는 노적봉·유달산봉수지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죽교동에 관음사와 달성사가 있다. 달성사(達成寺)에는 1759년(영조 35)에 제작된 범종이 보존되어 있으며, 달성사목조아미타삼존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000년 지정) 달성사목조지장보살반가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2000년 지정)가 있다. 사지로는 청명사지·목포사지가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죽교동에 목포시사(전라남도 기념물, 1976년 지정)가 있다. 이 밖에 달동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주둔했던 고하도이충무공유적(전라남도 기념물, 1974년 지정)과 이충무공기념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그리고 이충무공유허비와 비각 등이 있다. 용해동의 손한술은 시조창(무형문화재, 1999년 지정)으로 지정되었다.

기타 유적으로는 대의동에 구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1981년 지정)이 있고, 용해동의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현자총통(보물, 1995년 지정)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대성동에 사는 장주원은 옥장(중요무형문화재, 1996년 지정)으로 지정되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에 관해서는 문헌상의 기록이 없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2년 미국의 남장로교파 선교사들이 신자의 자녀 교육을 위해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를 최초로 세웠으며, 이어 1903년 영흥소학교(永興小學校)도 설립하였다. 두 학교 모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3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가 8·15광복 후 정명여학교는 1946년 정명여자중학교로, 영흥소학교는 1952년 영흥국민학교로 다시 개교하였다.

1907년 북교소학교(北橋小學校)가 최초의 공립학교로 개교를 보았다. 이어 1922년 목포제일중학교·목포상업중학교·이로소학교(以魯小學校)가, 1933년 산정소학교(山亭小學校) 등이 계속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1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15개교, 특수학교 1개교와 목포과학대학·목포해양대학교·목포대학교·목포가톨릭대학교 등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목포 예총 지부, 목포문화원, 목포시립도서관, 한국방송공사 목포방송국, 문화방송 목포방송국 등이 있다. 목포 예총 지부에서는 1962년 이후 매년 목포예술제를 10월 중순에 개최하며, 목포문화원에서도 같은 달 목포문화예술제를 열어 시민의 날 행사를 갖는다. 이들 두 행사 모두 지방문화와 예술의 진작, 보급을 위해 힘쓰고 있다.

목포예술제의 주요 내용으로 전국사진공모전입상작품전·사진작가협회회원작품전·문인협회시화전·미술협회회원전 등의 전시회와 음악협회회원음악발표회·예술제종합발표회 등의 발표회를 연다. 또, 대한민국연극제·대한민국무용제의 대상 수상작을 공연한다. 문화원의 문화예술제는 건전가요·고전무용·미술실기 등의 대회를 개최한다.

민속

이 지방의 민속놀이로는 강강술래·줄다리기·널뛰기·씨름 등이 전한다. 남서해안을 따라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강강술래」는 목포 특유의 놀이는 아니지만 이 지방의 전통적인 놀이로 손꼽힌다.

팔월 한가윗날 밤에 달이 바다 위에 떠오르면 동네 뒷산 넓은 공터, 또는 마을 앞 넓은 터 등에 여자들이 모인다. 선소리[先唱]하는 사람을 가운데 놓고,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부녀자들이 손에 손을 잡아 둥근 테의 강을 돈다. 강 속에 있는 사람이 진양조의 느린 가락으로 선소리를 뽑으면, 느릿느릿 강을 돌고 있던 부녀들이 “가앙강수울래에”하고 맞음소리로 받는다.

달이 점점 더 높이 떠오름에 따라 중모리 가락을 거쳐 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가락이 빨라지면서 흥이 고조된다. 이때 여인들의 발걸음도 잦아지는데, 왼발 오른발을 엇바꾸어 디디면서 “절부덕 척척 절부덕 척척”하는 소리가 제대로 박자를 맞추게 된다. 이것이 꼬드막 잦아져서는 술래의 외마디 선소리가 턱에 차고 미친 춤가락이 나온다.

맨 마지막에는 말을 이루는 선소리마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선소리 맞음소리 모두 ‘설레 설레가 잘도 돈다.’로 한 타령이 되고 바람에 날리는 갈대 모양으로 원무의 흐름이 쏠릴 대로 휩쓸리다가 끝이 난다. 이 풍습은 현재까지도 거의 원시적인 정서로 남아 우리의 흥을 돋워주고 있다.

목포에는 특별한 동제가 전하지는 않고, 다만 고하도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다. 이는 탕건처럼 생긴 바위에 산 돼지를 제물로 바치고 남도 특유의 선소리와 농악을 울리면서 지내는 제이다. 가뭄이 심할 때 탕건바위 근처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탕건바위를 돌면서 농악을 울리다가 제상이 나오면 산 돼지를 바위에 얹어놓고 제주가 절을 올린다. 제주에 이어서 모든 줄꾼과 농악대가 절을 한다.

다음에 제주가 “천지지신은 화위동심하셔서 비를 내려주소서, 만일 비를 내리지 않으시면, 바위 밑의 금·는 보화를 파내겠습니다. 장군님이 숨겨놓은 금은보화를 모두 파내겠습니다.”라는 주문을 크게 외치면서 기원한다. 이때 농악을 울리면서 탕건바위에 줄을 걸어 잡아당기는데, 줄꾼은 선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곁들인다. 노래가 진행되면서 힘센 장정 5, 6명이 바위 밑을 삽으로 파기도 하고, 붉은 피를 바위에 뿌리기도 한다.

“양반의 탕건에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피를 하늘의 빗물로 씻어주십시오.”라는 제주의 발원이 끝나면 아낙들이 나뭇단을 가져와 불을 놓고, 제주가 재배를 올린 뒤 마을사람 모두가 절을 한다. 타는 불 위에 바위에 걸었던 줄을 썰어 함께 태우면서 다시 농악을 울리면서 춤을 춘다.

불이 완전히 타고 꺼지면, 모닥불의 재를 소쿠리에 담아 논밭에 뿌리고 농악을 울리면서 각자 자기집으로 돌아간다. 이 기우제는 무속·설화·민요·민속놀이가 결부된 형태의 동제라 할 수 있다.

설화·민요

목포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고유의 전통·민속 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웃의 신안군·무안군 등과 문화양상이 비슷하며, 지역에 얽힌 몇몇 지명유래담이 전할 뿐이다. 그 중 「삼학도전설」·「나불도와 갓바위전설」이 그 대표적인 설화이다. 「삼학도전설」은 옛날 무예를 익히려는 한 장사의 비장한 각오가 담긴 이야기이다.

유달산에서 한 젊은 장사가 무예를 닦고 있었다. 절벽 같은 암벽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고, 활로 날아가는 새를 쏘아 떨어뜨렸으며, 큰 칼로 호랑이의 숨통을 끊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아침마다 마을에서 올라와 물을 길어가던 세 처자가 이 늠름한 장사의 모습에 연정을 품게 되었고, 장사 역시 날마다 마주치게 되는 그녀들에게 마음이 끌려 무예를 닦을 수 없었다.

장사는 무예수업을 마치기도 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몹시 자책하면서 마음을 굳게 다져먹었다. 하루는 산에 오른 세 처자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당신들을 사랑하게 되어 혼란스러워진 마음에 무예를 익힐 수 없으니 수업이 끝날 때까지 멀리 떨어진 섬에 가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세 처자는 어느 맑은 날 돛단배에 몸을 싣고 먼 섬으로 향하였다.

이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장사는 ‘세 처자가 살아 있는 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유달산에서 배를 향해 화살을 마구 쏘아날렸다. 천하장사의 화살을 연거푸 맞은 배는 두 동강이 나면서 목포 앞바다 한가운데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세 마리의 학이 솟아오르면서 슬픈 울음을 남기고 하늘 높이 날아갔다. 곧이어 세 개의 바위가 솟아오르면서 섬이 되었는데 이것이 삼학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나불도와 갓바위전설」은 불교설화이다. 공덕이 높은 성자인 아라한(阿羅漢)과 부처님이 영산강을 건너 피안(彼岸)의 섬으로 건너가려다 이편 언덕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이때 쉬던 자리에 깜박해서 놓고 간 갓이 굳어 갓바위가 되었고, 아라한과 부처님이 건너갔던 섬 이름을 아라한과 부처를 줄여 나불도(羅佛島)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밖에 목포 앞바다에 있는 고하도의 탕건바위에는 샘처럼 생긴 깊은 굴이 있는데, 여기에는 옛날 힘센 장수가 금은보화를 숨겨 두었다는 설과 한 궁녀가 숨겨둔 곳이라는 설이 함께 전해 온다. 가뭄이 들면 이곳 주민들은 기우제를 지내면서 탕건바위에 대고 비를 내리지 않으면 금은보화를 파내고 말겠다는 구지가식(龜旨歌式)의 무격적(巫覡的) 위협(威脅)을 하기도 한다.

목포 지방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의식요나 유희요 몇 편뿐이다. 인근 지역에 여러 가지 노동요와 부녀자들의 흥글노래(혼자 흥얼거리며 부르는 노래)가 많이 구전되는 데 비해 민요가 적은 까닭은 미처 조사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으나, 일찍부터 도시화·근대화되면서 이른 시기에 유리·소멸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의식요로는 고하도에서 ‘탕건바위놀이’라는 기우제를 지낼 때 부르는 여러 가지 노래가 전한다.

의식이 진행되면서 각 절차마다 노래가 불린다. 먼저 제주가 기원을 한 뒤 농악을 울리면서, “(앞소리)얼얼러 상사듸어/(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앞소리)비야비야 내려라/(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앞소리)비가오시지 않는다며는/금도캐고 보화도캐네/(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앞소리)나랏님이 숨겨놓은/금칼보화 찾아다가…….”라는 노래를 메기고 받는 선후창으로 부른다.

또, 제물로 바친 돼지의 피가 바위를 적시게 되면 “……(앞소리)피를보소 피를보소/(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앞소리)비내려서 저피닦소/(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앞소리)비안오면 모두죽네/(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앞소리)비야비야 많이 오소…….” 등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의식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전과정에서 부르는 노래가 선후창으로 불리고, 뒷소리가 모두 “얼얼러 상사듸어”로 되어 있어서 농업노동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별로 불리지 않으나 옛날에는 이 지역에서 농업노동요가 매우 성행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희요로는 강강술래 놀이에 따르는 「강강술래」가 다른 인근지역과 거의 비슷하게 불린다. 이 밖에 새 쫓는 어린이들의 노래, 「꿩서방」·「솔개」 등은 무안지방과 거의 비슷하다. 민요와는 좀 다르지만, 유선각(儒仙閣)을 중심으로 유달산의 경관을 읊은 「유선가(儒仙歌)」가 전해 온다.

산업·교통

조선 말기까지도 무안현에 딸린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1897년 개항된 이래 식민지 거점도시로 이용되면서 급속히 성장한 항구도시이다.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었고 호남에서 생산되는 쌀·목화·누에고치 등이 이곳에 집산되어 일본 고베[神戶] 항으로 실려 갔으며, 일본에서 가공된 물자는 여기서 하역되어 철도를 타고 내륙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과정으로 일제강점기에 목포는 광주보다 훨씬 번성한 도시였다.

8·15광복 이전까지 쌀과 목화의 수출항으로 큰 몫을 했던 만큼 공업은 정미·조면(繰綿)·양조·면실유(棉實油)·유지(油脂) 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현재는 청주(淸酒)와 주정(酒精)을 만드는 양조업과 도자기·유리공업 등이 성행하며, 고무·선구(船具)·어구(漁具) 공업 등이 활발하다.

도자기와 유리의 원료는 대부분이 다도해에서 나는 고령토와 규사를 사용하며 목포시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도자기업체인 행남사(杏南社)와 양조업체 보해(寶海)는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다. 1970년대 목포공단을 유치하는 등 제조업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나 11년이나 걸려 분양을 완료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도시로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빈약한데 2004년 현재까지 종업원수 및 생산액은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농업은 쌀·보리 생산 외에 동목포 부근에서 무·배추·딸기·수박 등의 고등소채와 과수재배가 행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양계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항구의 특성상 수산업이 발달해 어가인구는 2008년 현재 농가인구의 1.5배인 4,577명에 달한다.

수산물 어획고도 계속 증가추세에 있으며, 매년 수산물 계통 판매고만도 5만여 톤, 1억 원에 달한다. 통조림이나 원형동결, 조미가공 등 수산물 가공업도 2만여 톤을 넘는다. 연안의 넓은 간석지를 이용한 굴 및 대합 등의 양식업도 활발하며, 곳곳의 염전에서는 천일염을 생산한다.

상업 활동은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무안현의 작은 항구에 지나지 않아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거점 항구도시로 발전하면서 그 상세(商勢)가 전국적으로 신장되었다. 1920년에 들어선 2개의 매일시장은 곡물시장과 어물시장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과 함께 다른 지역이 크게 발전한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위축된 편이다. 목포항은 항구로서의 자연조건이나 입지조건에서 제약이 있기 때문에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상세가 크게 둔화된 것이다. 또한, 육상교통의 발달로 과거 목포와의 상거래선이었던 완도·진도·장흥·강진·해남 등이 광주권에 편입됨으로써 더욱 축소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신안군과 해남군 등의 다도해를 잇는 연안 항로의 중심지로서 제주도를 비롯하여 인근 165개 섬에 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목포는 호남선의 종점이며 국도 1호의 기점이기도 하다. 광주∼목포간 고속화도로가 4차선으로 확·포장되어 광주와 1시간 거리권이 되었다. 목포와 서울을 서해안을 통해 연결하는 서해안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한때 목포비행장이 개설되어 목포∼서울 및 목포∼제주간 항공기가 취항했으나 1970년대 초 석유파동을 계기로 휴항한 이래 폐쇄되었다가 1992년부터 취항이 재개되었다. 2007년 11월 무안국제공항이 개장하면서 목포비행장은 폐쇄되었다.

서남해 도서를 연결하는 연안항로의 기항지로서 그 역할이 중요하며, 요즈음은 인근에 새로운 대불공업단지(大佛工業團地)가 건설되고 있다. 이 공업단지가 완성되면 서남해 무역단지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으로 자못 기대된다.

관광

목포시는 홍도·흑산도 등 다도해와 내륙의 관광지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의 성격을 띤 곳으로, 수려한 해상경관과 많은 관광지를 보유하고 있다. 병풍을 둘러놓은 듯 기암절벽이 특이하게 펼쳐진 경승지 유달산은 순환도로·등산로의 개설과 종합적인 공원화사업으로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산중턱에 개설된 순환도로에서는 시가지와 영산호·고하도·갓바위는 물론 다도해까지 조망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 조각공원(彫刻公園)에는 100여 점의 수준급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최초의 난전시실에는 전국 각지에 자생하는 한국난 39종을 비롯해 288종의 난이 전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난의 배양과 재배에도 성공하여 저렴한 가격에 육종 분양하고 있다. 유달산 각 골짜기의 분지에는 유달공원·달성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20여 종의 운동기구를 설비한 체육공원도 있다.

목포 시내를 지나 남동해안 쪽으로 가면 용해동에 삼학도와 갓바위가 있는데 삼학도는 방파제 공사의 완공으로 육지화되었다. 갓바위 부근에는 수석과 서화를 함께 전시한 향토문화관과 남농기념관이 있다. 여기에는 남종화를 우리나라 화단에 정착시킨 소치(小癡) 허련(許鍊), 미산(米山) 허형(許瀅), 남농(南農) 허건(許楗) 등 3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남농기념관 건너편에는 신안유물을 전시한 해양유물전시관이 있다.

갓바위를 지나면 하구언 공사로 생긴 영산호가 있다. 영산호는 동양 최대의 호수로 방조제의 길이만도 4.3㎞에 달한다. 영산호의 조성은 자체의 관광객 유치 효과뿐만 아니라 영암을 비롯한 7개 군과의 해상운송을 육상운송으로 바꾸어 다른 군과의 연계관광을 보다 용이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하구둑을 막 지나면 전남농업박물관이 있다. 만호동에는 조선 초기 수군의 진영이었던 목포대가 있고, 북서해안에는 톱머리·유달 해수욕장이 있다. 유달산·고하도·갓바위·영산호 등지에는 관광편의시설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1981년 다도해지역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에는 다도해상의 항구도시로서 관광시설을 더욱 확충하고, 영산호 주변을 관광단지로 조성하는 등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특히 목포 앞바다에서 6㎞ 떨어진 외달도는 해변의 정경이 아름답고 오염되지 않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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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시(www.mokpo.go.kr)
목포교육청(www.mp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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