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귀순하여 약 4년반을 암약하다가 1957년 10월 18일 검거되었다.
박정호는 광복 후 북한에서 교역을 가장한 첩보공작 총책으로 활동하다가 1953년 5월 북한 내무상 방학세(方學世)의 지령을 받고 정당침투의 임무를 띠고 남파되었다. 지령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서울에 침투하는 즉시 위장자수하여 정당에 침투할 것, ② 조봉암(曺奉岩)과 자유당의 유화청(柳和靑, 초대총무국장)·정현모(鄭顯模, 초대당무국장)·진승국(秦承國, 당시 조사부장) 등 네 사람을 포섭하여 5·20선거(1954년)에 민의원으로 당선시킬 것, ③ 각종 중요기밀을 탐지, 보고할 것 등이다.
박정호는 남파된 뒤 합법적인 신분보장을 얻기 위하여 서울지검에 위장자수를 하고, 공작금으로 서울 중구 동자동에 대영목재주식회사(大榮木材株式會社)를 차려놓고 사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새로운 혁신세력을 규합하여 신당을 조직하고자 활동하고 있던 김경태(金京泰)·오중환 등을 포섭하고 막대한 공작금을 살포하면서 혁신세력 통합공작까지 벌였다.
정계거물인 장건상(張建相)·김성숙(金星淑)·조봉암 등 혁신계 정치인 20여명과 접선하면서 북한이 주장하는 이른바 평화통일노선에 입각한 정당을 조직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1958년 실시될 대한민국 민의원선거에서 같은 당원을 많이 당선하게 하여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변란을 기도하였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절차를 거쳐 1959년 5월 6일서울교도소에서 사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