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조는 1919년 3 · 1운동에서 기독교계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저술하였다.
김병조(金秉祚, 1877~1948)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윤석(允錫), 호는 일재(一齋)이다.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20세에는 직접 서당을 열었다. 1913년 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6월 졸업하고 그해 8월 목사 안수(按手)를 받았다.
1919년 2월 중순 이승훈에게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참여를 결정하면서 모든 절차를 그에게 일임하였다.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들이 모여 「 3 · 1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 참여하지 않고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을 만들어 평안북도 각지에 살포하였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단둥(丹東)을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이틀 후인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1919년 4월 말에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시사진술서(韓國時事陳述書)」를 발표하고 국제연맹과 만국장로교연합총회에 제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계에 나라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만든 『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6월에는 임시사료편찬회에서 수집한 사료를 바탕으로 『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발간하였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이외에도 상하이한인기독교회 담임 목사로 활동하였고, 대한적십자사의 상의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상하이 한인의 교민 단체인 대한거류민단 의사회 의원도 역임하였다.
1920년 3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직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손정도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를 조직하여 국내외 각 교회에 대한민국 교회의 실정과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보내는 일을 하였다. 1922년에는 한인 교포 자녀들이 다니는 인성학교 교사에 임명되었다.
1923년에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 모색을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난항을 겪자 그해 5월 상하이를 떠난 펑톈성〔奉天省〕 지안현 패왕조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서간도에서 패왕조교회와 화전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대동역사』, 『독립혈사』를 간행하였다. 1928년에는 지린성〔吉林省〕 무링현에 신일소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한족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33년 4월 귀국하여 평안북도 용천군 동상교회 목사로 시무(始務)하며 경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에 항거하여 고향인 정주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46년 반공 운동을 벌인 혐의로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