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이승훈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이승훈 전후면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오산학교 교장, 기독교 대표, 동아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 독립운동가.
이칭
남강(南岡)
이칭
승일(昇日), 인환(寅煥)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4년(고종 1)
사망 연도
1930년
출생지
평안북도 정주
관련 사건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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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오산학교 교장, 기독교 대표, 동아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호는 남강(南岡). 평안북도 정주 출신. 아버지는 이석주(李碩柱)이며, 어머니는 홍주김씨(洪州金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빈한한 서민집안에서 태어나 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6세 때에는 고향인 정주를 떠나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해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3, 4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1874년 학업을 중단하고 그 곳의 이름난 유기상(鍮器商)인 임권일상점(林權逸商店)의 사환으로 들어가 3년 뒤에는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다.

근면성과 성실성이 인근에까지 알려져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이경선(李敬善)과 결혼하게 되고, 이 때부터 점원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을 밟았다. 보부상으로 평안도 및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887년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해, 첫째 노동환경을 일신했고, 둘째 근로조건개선에 힘썼으며, 셋째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였다.

이와 같이, 근로자들의 작업의욕을 북돋아 생산능률이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해 한반도가 전장화되자 납청정의 이승훈의 상점과 공장은 전화(戰禍)를 입어 잿더미가 되었다.

덕천으로 가족과 함께 피란갔다 돌아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의 자본을 얻어 상점과 공장을 재건하였다. 1901년 평양에 진출,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손을 대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서울·인천을 왕래하며 사업에 성공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다시 사업에 실패하자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교육진흥론」 강연을 들은 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굳은 결심 아래 금연·금주와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와 서당을 개편해 신식교육을 가르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였다. 이어서 이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이승훈의 열성과 성의을 바탕으로, 이종성(李鍾聲)·이광수(李光洙)·조만식(曺晩植)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 교육사업에 헌신하면서 민족운동에 가담하던 중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해 가을에 105인사건이 일어나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임치정(林蚩正) 등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혔을 때, 이승훈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와 교회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출옥 즉시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되었다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동아일보사장에서 물러난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남강이승훈』(김기석, 세운문화사, 1970)
『3·1운동비사』(이병헌, 시사시보사, 1959)
『한국근세위인전』(오재식, 행정신문사, 1958)
『남강이승훈전기』(김도태, 문교사, 1950)
『동아일보(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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