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부터 일선기독교간친회는 일본인 교역자와 몇몇 한국인 교역자가 참가한 가운데, 1년에 두 차례씩 회합을 가졌다.
1937년 일제가 일선기독교일체화운동을 통해 일선일체화를 꾀하려 하였다. 그러자 일본 기독교청년회지도자 니와(丹羽淸次郎) 등 일본측 지도자들이 이에 호응, 한국인 교역자들을 설득하였다.
한편, 경기도 지사는 서울에 있는 한일 양측 목사 9명을 불러들여 일선기독교일체화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곧 요청에 응하여 그 해 4월 26일 종래의 일선기독교간친회를 경성기독교연합회로 개칭하고, 같은 해 5월 8일 경성 부민관(府民館)에서 거행된 발회식에서, 조선에 있는 일선기독교가 하나가 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전국 주요 도시에 지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각지에 권유문을 발송하였다. 또한 경찰의 압력이 가세되며 각 지방 기독교연합회는 속속 결성되었고, 그 해 7월초까지 52개 단체가 결성되었다.
1938년 7월 6일과 7일 양일간 서울에서 연합 대회를 열고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19일에는 기존의 에큐메니컬단체로 개신교 각 교파와 단체의 연합 기관이던 한국기독교연합회(NCC)를 강제 해산시키고 조선기독교연합회로 하여금 기능을 인수하도록 하였다.
그 후 감리교회·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주일학교연합회 등은 국제적 연합 기구에서 이탈, 일본의 각 유사 단체에 가맹, 합동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각 교단의 일본화 또는 폐쇄, 더 나아가 모든 교파의 합동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창설 등의 시초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