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학생 공학인 수원고등농업학교에서 우리 나라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공인해주는 ‘조선인 학생담화회’를 통하여, 전 인구의 7할이 농민인 우리나라에서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를 건설한다는 목표로 1926년 여름방학 중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각지에 야학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갱생의 길을 강의하면서 결사단원들의 단결과 교양을 높여나갔다.
1928년 6월에는 일본 동경에 설치되어 있던 조선농우연맹에 가입하였고, 그 해 농우연맹본부에서 계몽강연단이 국내에 들어와 활동할 때, 연맹의 수원지부 대표인 한전종(韓典鍾, 임학과 2년)이 이 강연단의 연사로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때 한전종은 조치원 등에서 강연중지를 당하였으며, 이 일을 빌미로 이 강연단은 강제해산되었고, 한전종은 학교에서 무기정학처분을 받게 되었다. 조선인 학생담화회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중시하여 건아단을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바꾸고 결사내용을 더욱 보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건아단출신인 김해공립농업학교 교사 김성원(金聲遠)이 경찰에 검속됨으로써, 계림농흥사 학생들은 1928년 여름에 다시 그 전의 조직체를 조선개척사로 개편하였지만, 사건은 확대되어 1928년 9월에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관련학생 11명이 붙잡혔다. →조선개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