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해외 각지에서 움텄던 독립운동도 미국이나 서구열강의 원조가 소극적이고 일제의 교묘한 술책과 탄압에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에 모인 청년정객들의 이상주의에 불과하여 처음부터 많은 분란과 오해의 요인을 안고 수립된 망명정부였다. 그런데 1921년 레닌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원조자금문제와 1925년 이승만(李承晩)대통령 면직결의 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결정적으로 난파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의 무장독립투쟁도 1920년 청산리대첩으로 절정을 이룬 뒤, 일제의 대토벌로 인해 러시아방면으로 밀려났다가,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해외 독립운동은 1922년을 고비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도 1920년부터 활발히 전개된 실력양성운동에 의해 민립대학설립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 등이 추진되었지만,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양단정책에 말려 1925년 이후 좌절되면서 부진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듯 국내외 기성세대들의 민족운동이 침체되어가는 상황 속에 1920년대 민족운동의 활력소는 학생운동이었다. 이전 분산적이고 비조직적인 맹휴의 성격에서 벗어나 학생층 전체를 망라한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항일학생운동으로 발현되었던 것이 6·10만세운동이다.
제위에 오른 지 4년 만인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자조와 실의 속에 살다가 1926년 4월 26일 죽은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에 대한 전국민의 애도는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유언비어와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심지어 육해군 7,000여 명을 경성에 집결시키고 부산과 인천에 함대를 정박시켜 놓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운동은 대체로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첫째 계열은 노총계(勞總系)로, 사회주의자 권오설(權五卨)을 중심으로 추진되다가 중국지폐위조사건(中國紙幣僞造事件)과 개벽지압수사건(開闢誌押收事件) 등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연류자가 붙잡힘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둘째 계열은 전문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社稷洞系)이다. 1926년 4월 26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 명이 세검정(洗劍亭)으로 춘계야유회를 가던 중, 순종 승하의 비보를 듣고 이 기회를 이용,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일으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20일 40여 명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 박하균(朴河鈞)의 하숙집에 모여 순종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먼저 준비책임자로 이병립(李炳立)·이병호(李炳鎬)·이천진(李天鎭)·박두종(朴斗鍾) 등을 선출하고, 자금은 박하균·박두종 등이 맡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거사계획은 일제의 감시가 기성 독립운동가들에 쏠리는 틈을 타 이뤄졌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6월 8일 이선호(李先鎬)·이병립·박두종·박하균 등이 서대문 솔밭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격문 30매를 만들고, 다음날 김종찬(金鍾讚) 하숙방에서 이병립이 “2천만동포의 원수를 구축(驅逐)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하였다.
격문은 『시대일보(時代日報)』 배달부 김낙환(金洛煥)을 통해 빌린 인쇄기계로 사직동 이석훈(李錫薰) 하숙집에서 1만 여매를 인쇄한 뒤, 이선호·박두종·이천진·박하균·유면희(柳冕熙) 등이 각각 자기학교 학생 및 관련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셋째 계열은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通洞系)이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이동환(李東煥) 등이 순종승하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5월 29일 통동의 김재문 하숙방에서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金性洙)·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이라는 격문을 기초하였다.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을 기다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4000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박두종 외 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시 30분경 동대문 근처에서 『시대일보』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오후 2시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의 항일독립만세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이에 군중들도 합세하여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학생 중 취조받은 자가 106명, 수감된 자가 53명이었으나, 어느 정도 시위가 가라앉자 이들 대부분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11명은 제령(制令) 제7호와 출판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그 해 11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렸다.
이 때 재판장 에토[江藤逸夫]의 심문에 주동학생들은 거침없이 거사의 동기와 목적을 진술하였다. 이병림은 “거사의 목적과 동기는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새삼 물어볼 것이 어디 있느냐?”, 박하균은 “우리 나라의 형편은 현명한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무엇을 알려고 하느냐?”, 이천진은 “호각으로 군호를 삼아 일제히 거사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애석하다”, 이선호는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거사에 임하였다”, 유면희는 “오로지 기미년 경험으로 재기하려 하였다”, 박용규는 “4,000여매의 격문을 각 남녀고보에 배부하였고 가회동 취운정에서도 계획하였다”, 곽대형은 “격문 500매는 만세 당일 돈화문 앞에서 살포한 뒤 통동계 학우들과 같이 숭인동방면으로 달려가 기회를 포착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들에게 검사는 13년의 실형을 구형하였으나, 그 해 11월 17일 재판장은 언도공판에서 10명에게는 23년, 1명에게는 1년의 징역형에 5년간 집행유예를 각각 언도하였다. 이에 검사가 상소를 제기하여, 1927년 3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10여 명은 징역 1년,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아 10명은 결국 수감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는데, 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 등지 뿐만 아니라 당진·강경·전주·하동·이원까지 파급되어갔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온 학생들의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학생운동이 결집된 소산으로 나타난 항일운동이었다.
그래서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담당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다. 2020년 12월 8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