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춘곡(春谷), 호는 덕재(德齋)이다.
3·1운동 당시에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학생으로 김성득(金性得)·김형기(金炯機)·김문진(金文珍)·김원벽(金元壁) 등과 함께 각 학교 학생들의 시위참여에 대한 일체의 임무를 맡고, 주로 서북친목회를 중심으로 동지규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문 1,500장을 받아 각 학교에 배부하고 학생간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또한, 3월 4일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서 각 전문학교 학생 지도급 대표와 장채극(張採極)·전옥결(全玉玦)·강우열(康禹烈) 등 중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서울학생 제2차시위계획을 세우고 김원벽과 함께 제2차운동의 최고 선도자로 추대되었다.
3월 5일 아침 시위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잡혀 1년 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3·1운동 때 48인 중의 한사람이다. 1945년 광복 후 월남하여 초대함경남도지사 및 함경남도민회장, 건국대학교 초대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사변 때 납북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