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임시정부는 내부적인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 개편이 필요했다. 그래서 1921년부터 각지의 국민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협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2년 동안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23년 1월 개최되었다.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 소집 주장한 박은식(朴殷植)·김창숙(金昌淑) 등의 촉진선언문이 상해에서 발표되고, 그해 4월북경의 군사통일회가 적극적으로 소집을 추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는 각지의 동포들로부터 호응 속에서 마침내 국민대표회의주비회를 결성하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은 1921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에 걸친 태평양회의 및 극동인민대표대회로 인해 조금 늦추어졌다. 그러나 1922년 5월국민대표회의주비회는 ‘소집 선언서’를 발표하고 9월 1일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다.
이후 각처에서 국민대표회의 촉성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준비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회의가 몇 차례의 연기를 거듭한 끝에 1923년 1월 3일에 개막되었다. 국내·상해·만주일대·북경·간도일대·노령·미주 등지에서 120여 개의 단체, 120여 명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안창호(安昌浩)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 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金東三)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 보완하여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난항을 거듭하였다.
3월 13일 임시정부 개조안이 상정되면서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5월 15일에 가서는 결국 개조파인 만주 대표들이 사임하는 사태가 전개되었다.
창조파는 윤해(尹海)를 의장에 추대하고 회의를 계속 진행시켜 개조 안을 부결 처리하였다. 이에 개조파가 회의를 전면 거부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는 사실상 결렬되었다.
회의가 63일이나 속개, 토의된 뒤 결렬되었으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회의 기간동안 대표 자격 문제를 심사하고 제반 규정을 토의, 통과시켰으며, 각 분과 회의를 개최하여 생계·재정·군사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토론하여 뒷날 의무교육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게 한 것은 큰 수확이라고 하겠다.
민족 대표들은 1923년 2월 21일 선서문과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전자에서는 대동 일치를 주장하고 희생정신으로 공결(公決)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서약하고, 후자에서는 국민의 완전한 통일을 견고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곧 철저한 독립 정신의 결정이며 전민족 공존 공영의 일대 기회였음을 나타냈던 것이고, 많은 문제 해결의 단서를 국민대표회의에서 찾으려 노력한 것이었다.
1921년 5월 발표된 국민대표회의주비회 선언문이 통일적·조직적 진행에 목표를 두었다면, 앞의 2·21선언문은 독립운동을 향한 과감한 대동 단합과 통일적 기관 계획 하에 대업(大業)을 이루기를 최대의 목적으로 하여 방향감각을 설정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창조파와 개조파간의 주장은 달랐으나 국민대표회의 대표들의 공통된 의견은 각계의 의사를 합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공산주의자라도 광복할 때까지는 독립운동에만 전념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은 자력적 조류에 따를 것을 지적하고 단합과 신뢰를 큰 목표로 삼고 있었다. 또, 민주공화국의 국시를 확정하여 국민의 의사를 수정 없이 집중하고자 하였으며, 일대 독립당을 조직할 것도 주장하였다.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15일까지의 4개월 반은 창조파와 개조파의 회의 기간이며, 6월 7일까지 20일간 더 연장한 것은 순창조파(純創造派)의 회기였다. 창조파와 개조파 외에 통일적 대단합을 주장한 중도파가 있었으나, 그 수가 극히 적었고 강세를 유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내외적 안정세를 구축하지 못한 취약성을 드러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대표회의는 3·1독립 선언의 부흥으로 시발된 것을 엿볼 수 있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어 최대의 조직적 발언과 국민 의사 총합의 대광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민대표회의는 우리 국민이 역사적 경험과 시대적 사조에 합치한 각오로 전통성에 입각한 민족 고유의 기능을 가장 실제적인 큰 방침(方針)으로 조직력 있게 발휘하려는 대사명이었다.
그리고 사회적 또는 국가적 제방면에 대하여 모든 구태에서 탈피하고 창조적 정신과 재능으로 날로 새로워지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쓸데없는 분규·권태·착오의 와중에서 거의 무산되고 퇴색(褪色)되어 가던 3·1독립선언의 정신을 재현시켜 이를 가장 유효하게 전개할 목표 하에 개최된 유사이래 처음 보는 국민적 대회합이었다.
국민대표회의 개최 자금은 한형권(韓馨權)이 모스크바로부터 지참한 20만원으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민족·공산 양진영의 견해와 주장이 상충하기 때문에 검토의 여지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