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83년 평안남도 강서 출생으로 23세에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 유학 중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한 후 일제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삼았다. 귀국 후 오산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3·1운동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으며,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어린이대공원과 오두산통일전만대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 내 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 · 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 ·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을 발기하였고,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 · 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 무저항 · 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