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원. 초명은 남훈(南勛), 아명은 장손, 호는 해온(解慍). 황해도 은율 출신. 백진모(白鎭模)의 아들이다.
19세에 장연공립소학교를 마쳤다.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하고, 1905년 9월 장연예수교회가 세운 광진학교(光進學校) 교사로 재직하며 김구(金九)·채원용(蔡元瑢)과 함께 장연군 학무위원으로 선출되어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24세에 상경하여 경신학교와 보성학교 1·2부 청강생을 거쳤다. 이듬해 일본유학의 길이 열려 14년간 동경(東京)에 머물며, 1913년에 메이지학원(明治學院), 1917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부 졸업을 전후하여 학생운동과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재일조선유학생학우회 회장에 중임되고, 이어 1917년부터 재일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를 6년 동안 맡아보았고, 특히 1919년 2·8독립운동 때는 막후에서 실무를 맡았다. 1923년 귀국하여 광복 전까지 민족교육에 몰두하였는데 진주 일신여학교, 부산 동래일신고등여학교를 거쳐 서울 오성학교 후신인 협성실업학교, 광신상업학교 등의 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민족항일기 말기에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지사적 교육자로 이름이 있었다.
광복과 함께 한민당(韓民黨)에 가담, 창당 간부로 정계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55년 민주당(民主黨) 발족 이래 최고위원으로 야당육성에 주력하다가 1960년 제5대 민의원선거에 당선되어 8개월간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1년 신민당(新民黨) 전당대회 의장, 1963년 민정당(民政黨) 최고위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나의 일생』이 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