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영암 출생. 도쿄 유학시절 1919년의 2·8독립선언에 즈음하여 김도연(金度演)·김안식(金安植)·최원순(崔元淳)·정광호(鄭光好) 등과 회합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할 때임을 재일유학생사회에 주창하였다. 이윽고 거사자금 조달을 위하여 김안식과 서둘러 귀국하였으나 뜻한바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듬해 일제의 식민정책 완화조처의 일환으로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 등 세 종류의 민간신문이 창간되자 신문학 연구에 몰두할 선구적인 뜻을 세우고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 유학하였다. 그 대학에서 뷔허(Bucher,K.)가 창설한 신문연구소에서 신문학 강좌를 수강하는 한편, 에베르트(Everth,E.)의 지도 아래 연구에 정진했다.
1928년 「동아시아(한국·중국·일본)에 있어서 근대신문의 생성발전에 관한 연구」로 학위논문이 통과되어 한국인으로서는 첫 신문학박사가 되었다. 이 논문은 한·중·일 3국의 주요 신문에 대한 생성과 전개를 연구한 비교신문사(比較新聞史)의 최초 작업으로 공인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동광(東光)』 제34호에 국내언론계에 대한 제언으로 ‘학술적 전문잡지가 필요’를 발표하였고, 1932년 신문간행의 이론적 학술화를 열망하는 충정을 보였으며, 『신동아(新東亞)』를 통하여 ‘시위운동과 군중심리’(1931)·‘투서(鬪暑)와 봉사로써’(1934)·‘현대사회사상의 동향’(1935) 등의 기고로 사회현상의 해명에 학구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사회철학자로서 광복 전까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출강하였고, 광복 직후 성균관대학 학장과 전주사범학교 교장을 거쳐 조선대학 문리학부장으로 재임 중 좌익계의 저격으로 사망하였다. 사회철학이론 정립의 저서로 1950년 대성출판사에서 간행한 『사회학개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