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

김홍일
김홍일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국독립군, 국민혁명군 등에서 활동하였고,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사용할 폭탄을 제작하였으며, 해방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군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일서(逸曙), 왕웅(王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8년(고종 35)
사망 연도
1980년
본관
김해(金海)
출생지
평안북도 용천
관련 사건
1·8일왕저격|4·29상해의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한국독립군, 국민혁명군 등에서 활동하였고,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사용할 폭탄을 제작하였으며, 해방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군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홍일(弘日), 호는 일서(逸曙). 별명은 최세평(崔世平), 중국식 이름은 왕웅(王雄) · 왕일서(王逸曙) · 왕부고(王復高). 평안북도 용천 출신. 중국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를 졸업한 이후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고, 중국군의 요직을 거치기도 했다. 해방 후 귀국해서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아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정치가로도 활동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진건(振健)의 3남으로 일찍이 압록강을 건너 15세에 만주 봉천(奉天)에서 중국소학교를 마치고 귀국하여, 18세에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재직 중 오산동문회가 항일단체로 몰려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곳에서 구국일보사(救國日報社) 사장인 중국인 황개민(黃介民)의 도움으로 1920년 구이저우[貴州]의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무관학교의 생도대장 · 교관 · 중대장 · 대대장, 1921년 독립군의용군단 대장, 1923년 조선의용군 부사령관 등을 거치면서 일본군 소탕전에 적지않은 공적을 올렸다. 그러나 헤이허사변(黑河事變)으로 독립군이 참변을 겪은 데 큰 충격을 받고, 1926년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하여 장개석(蔣介石)의 북벌에 직접 나선 적도 있으며, 1945년 5월 중국군 중장으로 승진될 때까지 근 20여년 간 항일전투는 물론 한국의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적극 지원하였다.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는 동안 총사령부 병기감, 통계과장, 우쑹요새(吳淞要塞)의 사령부 참모장, 상해병공창 군기처 주임, 육해공군 총사령부 군기처장 등 중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장교로 있으면서, 김구(金九)의 뜻에 따라 한인애국단의 거사에 비밀작전 참모격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송식표(宋式驫)와 함께 1932년 이봉창(李奉昌)의 1ㆍ8일왕저격 및 윤봉길(尹奉吉)4ㆍ29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하였다. 이봉창의 거사가 일왕 히로히토(裕仁)를 죽이지는 못하였지만, 윤봉길의 의거는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비롯한 10여 명의 일본 요인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게 하였다.

중국군 상해병공창 주임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는 19로군 후방 정보국장을 겸임하면서 일본 해군기함 이즈모호(出雲號)의 폭파와 일본군 무기창고 폭파계획도 아울러 진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1937년 동로군(東路軍)사령부 참모를 비롯하여 집단군 참모처장 · 사단장, 병단(兵團) 참모장, 청년군사령부 부참모장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1943년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45년 6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국 동북보안사령장관부(東北保安司令長官部)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취임하여 광복 당시 만주 일대에 거류하는 한국인 동포의 보호와 본국송환에 진력하였고, 1946년 말에는 미중앙정보단(CIG)의 비밀 업무를 지원하기도 했다. 1947년 5월 중국 국방부 · 정치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8월 귀국하였다.

1948년 육군 준장으로 임명되어, 그해 12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6 · 25전쟁 직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선에서 밀려오는 적을 1주일간 방어한 뒤, 육군 제1군단장으로 평택지구에서 포항탈환작전에 이르기까지 전공을 세우고, 육군종합학교 총장으로 군간부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1951년 10월 예편된 뒤 주중 대사가 되었고, 타이베이 외교사절단장으로 활약하다가 10년 만에 귀국하여 1961년 5 · 16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고문과 군정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1965년 한일협정을 적극 반대, 박정희(朴正熙)와 결별하고, 1967년 정계에 투신하여 제7대 국회의원이 된 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의장을 거쳐, 1971년 유진산(柳珍山)이 한때 물러난 뒤에 당수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 해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당내로는 김대중(金大中)과 제휴하여 1971년 신민당 당수가 되었으나, 당내 양파가 각각 전당대회를 열어 1당 2당수의 내분을 겪은 뒤, 1972년 9월 당수직을 사임하였다. 박정희의 삼선개헌유신체제에 반대하고, 만년에는 광복회 회장을 맡았다. 1980년에 82세로 사망하였다.

저서

저서로는 『국방개론』(고려서적, 1949), 『대륙의 분노』(문조사, 1972)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을지무공 · 태극무공 · 청조근정 등의 훈장도 수여되었다. 중국 정부로부터도 충근(忠勤) · 대수운마(大綬雲摩) · 대수경성(大綬景星) 등의 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정병준, 돌베게, 2006)
『벗과 함께 영원한 인생(人生)을』(김동리 편, 휘문출판사, 1973)
『대륙의 분노』(김홍일, 문조사, 1972)
『백범일지』(김구, 국사원, 194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www.history.go.kr)
육군사관학교(www.kma.ac.kr)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임중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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