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는 박천군·태천군, 서쪽으로는 선천군, 남쪽으로는 황해, 북쪽으로는 구성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4°57′∼ 125°27′, 북위 39°23′∼ 39°51′에 위치하며, 면적 827.71㎢, 인구 16만 4261명(1944년 당시)이다. 1읍 12면 86동리로 되어 있으며, 군청소재지는 정주읍 성내동이다.
군의 북쪽은 적유령산맥의 말단이 미쳐 대체로 300m 내의 노년기 구릉을 이룬다. 중앙에서 동으로 석수봉(石秀峰, 293m)·묘두산(猫頭山, 310m)·오봉산(五峰山, 341m)·칠악산(七嶽山, 365m)·제석산(帝釋山, 218m)이 있으며, 북부 중앙에는 심원산(深源山, 567m)·독장산(獨將山, 545m)·능한산(凌漢山, 421m)·임해산(臨海山, 201m)·천태산(天台山, 166m) 등이 이어져 남쪽으로 차츰 완경사를 이룬다. 따라서 전역은 비교적 평지가 많으며, 특히 해안에는 넓은 해안평야가 발달되었다.
하천으로는 동래강(東萊江)·사송강(泗松江)·달천강(獺川江)·청천강구(淸川江口) 등이 평지를 남류하여 황해로 들어간다. 이들 하천은 주운(舟運)에는 별로 이용되지 못하지만 수리·관개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해안선은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해안으로 그 연장이 209.2㎞에 달하나, 간석지가 많아 좋은 항구는 드물고 간척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앞바다에는 내장도(內獐島)·운무도(雲霧島)·형제도(兄弟島)·갈도(葛島) 등 많은 도서가 산재한다.
북부지방에 위치하며 겨울철에는 북서계절풍을 직접 받아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에 속하나, 바다의 영향을 받아 내륙의 어느 군보다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연평균기온 8.6℃, 1월 평균기온 -9.9℃, 8월 평균기온 24.4℃, 연강수량 1,129㎜로 강우의 하계집중이 심하고, 얼음은 10월 18일부터 이듬해 4월 22일까지 언다.
[고 대]
이 군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덕언면 대산동에서 발견되고 있으므로 적어도 신석기시대부터는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도 덕언면 석산동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
철기시대에 연맹왕국이 형성되면서 56년(태조왕 4)에 고구려가 살수, 즉 지금의 청천강까지 진출함에 따라 이곳은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이지만 군현이 설치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612년(영양왕 23) 수나라 양제(煬帝)의 침공 때에는 평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시대에는 서경압록부에 속하여 있었다.
[고 려]
발해가 망하고 거란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여진족이 잡거(雜居)하고 있었다. 지금의 정주가 고려의 영토로 편입된 것은 고려가 북진정책을 써서 정종 때 청천강 이북 덕창진(德昌鎭:지금의 박천)에 성을 쌓고, 광종 때 위화진(威化鎭:지금의 운산)·무주(撫州:지금의 영변) 등지에 많은 성을 축조하면서부터이다.
정주군의 전신인 구주(龜州)는 본래 만년군(萬年郡), 곽주는 장리현(長利縣)이라 칭하다가 993년(성종 12) 제1차 여단전쟁 때 서희(徐熙)의 활약으로 강동6주, 즉 흥화진(興化鎭)·용주(龍州)·철주(鐵州)·통주(通州)·구주·곽주를 회수하고 이듬해서희가 여진을 몰아내고 곽주·구주에 성을 쌓음으로써 완전히 고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1018년(현종 9) 제3차 여단전쟁 때는 적장 소배압(蕭排押)이 개경 부근까지 진격하였다가 고려군의 반격으로 철군하는 것을 강감찬(姜邯贊)이 구주에서 요격(邀擊)하여 구주대첩을 거두었다. 같은 해 구주·곽주에 방어사를 설치하였는데 위주(渭州)·인주(麟州) 등 그 밖의 여러 지역에 방어사를 설치한 것은 이곳에 진을 설치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1216년(고종 3) 거란의 금산(金山)·금시(金始) 두 왕자가 거느린 9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여 구주를 포위하고 철주·선주를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1221년곽주에 반역사건이 일어나서 강등되어 정리(定裏)로 개칭되었다.
1231년 제1차 여몽전쟁이 일어나 몽고의 장수 살례탑(撒禮塔)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거쳐 남하하여 구주를 포위하고 곽주를 함락시켰다. 구주를 지키던 서북면병마사 박서(朴犀)는 정주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등과 끝까지 성을 지켜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이곳은 정원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로 승격되고 뒤에 도호부로 되었다가 또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쳤으며, 주치(州治)를 마산(馬山) 남쪽으로 옮겼다.
여몽전쟁 때 정리의 주민들은 몽고병을 피하여 섬으로 갔다가 1261년(원종 2) 육지로 돌아왔으며, 수주(隋州)에 예속되었다. 곽주로 회복되었다.
[조 선]
1413년(태종 13) 곽주를 곽산군(郭山郡)으로 고쳤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 당시 정주목의 호구는 1,033호 5,466인, 곽산군은 302호 2,481인이었다. 정주목의 목사와 곽산군의 지군사는 의주도좌익병마(義州道左翼兵馬)를 겸하였다. 1455년(세조 1) 고구주(古龜州)의 땅에 따로 구성군(龜城郡)을 설치하고, 이듬해 11월 운산군에 속하여 있던 고운산(古雲山)이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하여 이곳에 합쳤다.
1466년의주와 안주 두 진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방어에 지장이 많아 수천군(隨川郡)을 폐하여 정주에 합하고 거진(巨鎭)으로 만드는 동시에 치소를 이곳에 옮겼다. 진관은 안주진관에 속하여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가는 길에 정주에 들러 3일간 머물렀다. 그 뒤 이곳 사람들이 태조의 고사와 선조의 주가(駐駕) 사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 밖에 양성기적비(兩聖紀蹟碑)를 세웠다.
정묘호란 때 선천·곽산·정주 3군의 병사가 곽산 능한산성(凌漢山城)에 집결하여 후금군에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함락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정주목사 안영남(安穎男)이 능한산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어 전사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18방(坊)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9,859호 4만 5737인이었다.
1811년(순조 11) 가산 다복동에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 봉기 수일 만에 가산을 비롯하여 박천·정주·곽산·선천·철산·용천·태천이 반란군의 손에 들어갔다. 반란군은 여세를 몰아 안주·평양으로 진격하려다가 청천강 건널목인 송림동의 첫 전투에서 패하였다.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반란군은 정주성으로 후퇴하여 이를 포위한 관군과 4개월 동안 치열한 공방을 계속하였으나 이듬해 4월 19일에 함락되어 홍경래는 전사하였다.
정주는 반역향(叛逆鄕)으로 몰려 정원현(定遠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복귀되었다. 정주는 예로부터 알려진 학향(學鄕)으로 많은 과거급제자를 내었다. 이 가운데 두드러진 사람으로 숙종 때 활약한 김남헌(金南獻), 1771년(영조 47) 8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신수채(辛受采), 정묘호란 때 능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전사한 김성향(金聲逈), 병자호란 때 포로 수천 명을 탈환한 강여즙(康汝楫) 등이 있다.
[근 대]
1895년) 부군제가 실시되자 의주부 정주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896년평안북도 정주군으로 되었다. 1907년 당시 정주군의 행정구역은 서부면·서원면 등 19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8,550호 4만 2162인이었다. 1905년경의선이 개통됨에 따라 운전·고읍·정주·하단·곽산역이 생겨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였다.
1913년 동부면·서부면을 합하여 정주면으로 고치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곽산군 대부분을 병합하였다. 1931년 정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12면으로 편제되었다. 1939년 9월 정주에서 수풍에 이르는 평북선이 개통되어 고안·봉명역이 생겼다. 서울에서 의주에 이르는 국도와 구성·태천·박천·희천 방면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하여 이 군의 교통망은 사통팔달하였다. 1943년의 호구는 2만 9880호 16만 5183인이었다.
1911년 105인사건 때 정주 출신의 정희순(鄭希淳)은 혹독한 고문으로 죽었고, 기소된 인사 가운데 44명이 이곳 출신이었다. 3·1운동 때 이승훈(李昇薰)·김진팔(金鎭八) 등에 의하여 사전 연락이 되어 있었으므로 3월 1일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또, 장날인 3월 31일 각지에서 2만 5000여 명이 모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였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의하면 집회횟수 18회, 집회인수 5만 5000명, 사망자수 120명, 부상자수 525명, 투옥자수 567명, 교회 소실 6개, 학교 소실 2개이다. 임시정부의 연통제조직에 있어서는 군감으로 조황균(趙煌均), 참사로 박병헌(朴秉憲)이 임명되었다. 1928년 2월 28일 침향농민회사건이 일어났으며, 1930년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광주학생사건 처리에 대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이 군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승훈·이명룡(李明龍)·김병조(金秉祚)가 있고, 3·1운동의 모체가 된 이른바 48인 가운데 현상윤(玄相允)·김도태(金道泰)·김지환(金智煥)이 있다.
또, 독립운동가 김문세(金文世)·김은제(金恩濟)·김창의(金昌義)·백운각(白雲閣)·승영제(承永濟)·승치현(承致賢)·조형균(趙衡均)·홍익성(洪益成), 소설가 이광수(李光洙)·이석훈(李石薰), 시인 김억(金億)·김소월(金素月), 교육가 백낙준(白樂濬), 언론계 방응모(方應模), 불교계 이학수(李學洙), 의학계 백인제(白麟濟), 영문학자 김여제(金輿濟), 언론인이며 경제학자인 서춘(徐椿)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이곳에는 객사인 연훈루(延薰樓), 조선태조와 선조가 이곳에 머물렀던 것을 기념한 양성기적비, 홍경래가 최후를 마친 정주성(定州城), 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유효원의 평서비(平西碑), 심원사대웅전(深源寺大雄殿), 표절사(表節祠), 충의단(忠義壇) 등이 있으며, 곽산면의 능한산에는 능한산성과 자운사(慈雲寺)가 있다.
정주와 안주지방의 역사와 지리에 대하여 쓴 『신안지 新安誌』에 의하면 정주성은 조선 초기에 축성하였다고 하며 처음에 흙으로 쌓았던 것을 뒤에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성곽의 높이는 2∼5m이고, 요소에 추(椎)가 남아 있다. 능한산성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 6,913척(2,094m), 높이 13척(3.93m)이며 성내에는 23개의 우물과 1개의 연못, 군수물자를 넣어 두던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서희의 지휘 아래 994년(성종 13)부터 996년에 걸쳐서 축성하였다.
임포면 원하동에는 장경사오층탑(長庚寺五層塔)이 있다. 이 탑은 높이가 2.8m이며 2중기단 위에 화강석을 다듬어 5층의 탑신을 갖추었으나 1∼3층의 탑신이 각각 다른 모양이고 4·5층의 탑신은 3층 탑신과 비슷하다. 유적발굴조사로는 1958년 덕언면 석산동에서 당산선사유적을 발굴조사하였다. 이 유적지는 패총으로서 연석(碾石)과 연석봉(碾石棒), 짐승의 뼈와 뿔로 만든 칼·뼈침·빗살문첨저형토기[尖底形櫛文土器]·화형호(花形壺)·번개문토기[雷文土器] 등이 출토되어 중요한 유적지로 주목되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725년(영조 1)에 증축한 정주향교와 곽산향교가 있다. 서원으로는 1663년(현종 4)에 세우고 1671년에 사액된 봉명서원(鳳鳴書院)과 1712년(숙종 38)에 세우고 1716년에 사액된 신안서원(新安書院)이 있다. 또한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7의사를 제사하는 표절사, 갈산면의 승천재(升薦齋) 등이 있어 많은 선비를 양성하였다.
이 군은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한데, 『국조방목』에 의하면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277명으로 서울의 292명에 버금간다. 1915년 당시 서당은 76개 소가 있었으며, 학동은 2,526명이었다.
근대식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이승훈이 승천재 자리에 세운 오산사립중학교가 최초였다. 이 학교는 3·1운동 때 일본경찰에 의하여 완전히 불탔으나 1926년에 5년제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어 1935년에는 학생수가 441명에 이르렀다. 1909년 승천재 자리에 오산사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그 뒤 1면1교정책에 따라 1929년까지 각 면에 9개의 공립보통학교가 개설되었다. 이 밖에도 유지들에 의한 간이학교인 학원이 수없이 많았다.
불교사원은 1935년 폐사된 것이 19개이고 5개가 남았으나 그 세력은 보잘것 없다. 이 군에는 기독교, 특히 장로교파의 세력이 강하며, 평동노회(平東老會)에는 47개 교회와 교인 7,801명이 속하였다(1941년 당시). 오월 단옷날을 가장 큰 명절로 여겼으며, 남자는 씨름, 여자는 그네뛰기를 즐겨 하였다.
이 고장에는 〈메추리에 관한 설화〉가 전하여지고 있다. 어느 날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메추리를 보고는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메추리는 자기를 잡아먹지 않고 살려주면 배부르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어떤 여자가 머리에 밥광주리를 이고 갔다. 메추리는 여우한테 여자가 이고 가는 밥을 먹게 해줄 테니 따라오라고 해놓고 그 여자 앞에 날아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여자는 이것을 보고 매추리를 잡으려고 하였다. 메추리는 조금 앞으로 가서 또 졸고 있었다. 여자가 가서 잡으려고 하면 또 조금 뛰어가서 졸았다. 여자는 메추리가 잡힐 듯 잡히지 않으니까 머리에 이고 있던 밥광주리를 내려놓고 잡으려 하였다.
잡으려 하면 또 저만큼 가고 잡으려 하면 또 저만큼 가고 해서 상당히 먼 데까지 여자는 따라갔다. 그러는 사이에 여우는 밥광주리에 있는 밥을 다 먹었다. 여자는 메추리를 잡지 못하고 밥광주리 있는 곳에 와서 밥이 없는 것을 보고 멍하니 서 있었다. 메추리는 이것을 보고 공중에서 웃었다. 그리고 여우한테 내려와서 배불리 먹었느냐고 물었다. 배불리 먹었다고 하니까 그럼 우스운 꼴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옹기장수 형제가 옹기를 지고 형은 앞에 가고 동생은 뒤에서 따라갔다. 메추리는 형의 옹기짐에 가 앉았다. 동생이 이것을 보고 메추리를 잡겠다고 손을 내밀었는데 닿지 않으니까 작대기로 내리쳤다. 메추리는 잽싸게 날아가고 형의 옹기만 깨고 말았다. 형은 그만 화가 나서 동생의 옹기짐을 작대기로 쳐서 깼다. 동생은 어떤 놈이 옹기를 깼느냐 하면서 서로 싸움을 하였다. 여우는 멀리서 이것을 보고 웃고, 메추리도 공중에서 웃었다.
메추리는 여우에게 배도 부르고 우스운 것도 보았으니 다음에는 눈물나는 것을 보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땅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서 코만 내밀고 흙에 묻혀 있으라고 하였다. 여우는 메추리가 하라는 대로 코만 내놓고 땅에 묻혀 있었다. 메추리는 여우의 콧등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마침 소금장수가 지나가다가 메추리가 졸고 있는 것을 보고 못이 박힌 작대기로 후려쳤다. 메추리는 잽싸게 날아가고 여우 콧등만 맞았다. 메추리는 여우 앞에 와서 눈물나는 꼴을 보았느냐고 하였다. 여우는 화가 나서 메추리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메추리가 놀라 도망치려 하였으나 여우는 메추리 꽁지를 물었다. 그래서 메추리 꽁지는 빠져버렸다. 오늘날 메추리 꽁지가 없는 것은 그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요로는 〈신랑요〉가 전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스방태 꼴망태/의주벙거디 날라리/저어미십당 호랑당/춘향이오마니 땅꽁알/대추○에 걸레서/피가졸졸 나온다/수리수리 수리워─이.” 옛날에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있어서 10세 전후의 아이가 장가가서 신랑이 되었다. 이런 어린 신랑은 어른답게 의젓하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철없는 행동을 한다. 그러한 까닭에 같은 나이 또래의 미혼 친구가 여러 가지 비어를 사용하여 놀리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이 군은 평야가 넓고 토양이 비옥하며 관개시설도 비교적 잘 되어 있어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옥수수·수수·감자 등이다. 특히 정주미(定州米)로 불리는 쌀은 질이 우수하며 생산량도 도내에서 제일 많다. 부업으로 축우·양잠·양돈 등을 한다.
연해에서는 새우·조기·갈치·뱅어 등이 많이 잡힌다. 지하자원은 금과 흑연이 각처에서 발견되나 채굴사업은 부진한 편이다. 공업으로는 양조·정미업이 일반화되었으며, 납청정(納淸亭)의 유기(鍮器)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상업활동은 모두 정기시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1830년에는 순장(旬場)인 하장(下場, 1·11·21일)·상장(上場, 6·16·26일)·신장(新場, 7·17·27일) 및 갈지(葛池)의 용포장(龍浦場, 2·12·22일) 등과 5일장인 마산면의 납청장(納淸場, 3·8일)이 있었다. 시장에서 거래되던 품목은 쌀·콩·밀·개석잠풀[水蘇]·포목·솜·조기·소금·놋그릇·옹기·돼지·닭 등이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902년에는 읍내장(邑內場)·납청장·곽산장(郭山場)·고읍장(古邑場), 대전면의 운전장(雲田場), 고현면의 탄우장(灘隅場), 동주면의 암두장(巖頭場)·해산장(海山場) 등 8개의 5일장이 있었다. 정주장(읍내장)은 약 350년 전에 목사 오대익(吳大益)이 민고(民庫)를 파하여 열었는데, 시설이 갖추어지진 않았으나 쌀·옥수수·일용잡화·포목 등이 많이 거래되었다. 시장의 규모는 2,500평에 달하며 평양·부산 등지에서도 상인이 모여들어 1938년의 거래액이 100만 원을 상회하였다.
납청장의 규모는 3,462평이며, 쌀·소·유기·숯·일용잡화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시장은 국유이므로 면장이 관리하며 상인들로부터 거래액의 1푼(分)에 해당하는 시장세를 징수하였다. 납청동의 유기제조공장에서 유기를 출장(出場)함에 따라 시장이 성쇠하였다. 곽산장은 미곡시장으로 유명하다. 이 시장의 쌀은 품질이 우수하여 서울로 반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수출되었다.
이 밖에도 수산물·포목·가축·잡화 등의 거래가 활발하여 1926년의 거래액이 37만 원을 초과하였다. 이 군은 경의선과 삭주선이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므로 납청장의 유기와 곽산장의 쌀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여졌다.
이 군에는 도로와 철도는 발달하였으나 해운은 부진하다. 정주를 기점으로 1등도로가 동서로 신의주·평양에 이르고, 2등도로가 북쪽으로 삭주·수풍에 통한다. 경의선이 국도를 따라 부설되어 교통의 대동맥을 이룬다. 또한 정주역에서 북쪽으로는 평북선이 Y자형으로 분기되어 청수·수풍에 이른다. 연안바다가 멀리까지 얕고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여 소형 어선과 민선만 드나들 뿐이다. 옥천면에는 탄산가스가 함유된 옥호동약수가 있다.
[정주읍 定州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16.26㎢, 인구 1만 8631명(1944년 당시). 읍소재지는 성내동이다. 본래 동부면(東部面)과 서부면(西部面)이었으나 1913년 두 면을 병합하여 정주면으로 개칭하고 1931년 정주읍으로 승격하였다. 북쪽의 천검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읍의 진산인 독장산 여맥에 북장대(北將臺)가 솟아 있고, 동쪽에는 달천강이 남류한다.
달천강은 길상산(吉祥山)에서 발원한 지류와 석현(石峴)·심원산에서 발원한 줄기가 합류하여 황해로 유입한다. 이들 하천 연변에는 범람원이 발달하여 관개에 의한 논농사가 활발하다. 식생은 낙엽송·소나무·참나무 등이 주종을 이룬다. 교통은 경의선의 본선철도가 읍의 중심을 횡단하고 사방으로 도로가 뻗어 있어 편리하다.
고려 1364년(공민왕 13)에 이성계(李成桂)가 역신 최유(崔濡)를 격파한 곳으로 성외동에 성적비(聖蹟碑)가 있다. 유적으로는 북장대 아래의 봉명암(鳳鳴庵)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 교가 있다. 성내(城內)·서주(西州)·성외(城外)·덕산(德山) 등 4개 동리가 있다.
[갈산면 葛山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8.44㎢, 인구 1만 8502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정양동이다. 본래 갈지면(葛池面)과 오산면(五山面)을 병합하고 1913년 가산군 군내면 애도리를 편입하여 갈산면이 되었다.
면의 북쪽에 자성산(慈聖山, 254m)·정정산(鼎定山, 222m)이 있고 남동쪽에 검산(劍山, 186m)이 있다. 북동쪽의 장포천(長浦川) 유역에는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어 논농사가 행하여진다.
남쪽해안에는 애도(艾島)·붕배도(崩盃島)를 비롯한 많은 섬들이 산재하며, 애도에서는 조기·낙지·갈치·새우 등이 많이 잡힌다. 익성동에 있는 익주성(益州城)에는 토성성문과 장대가 남아 있으며, 제석사(帝釋寺)·자성사(慈聖寺)·일해정(逸海亭) 등이 있다. 속흥산에 있는 약천(藥泉)은 물맛이 좋아 가까운 곳뿐만 아니라 먼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정양(鼎陽)·익성(益城)·광동(光東)·용흥(龍興)·흥록(興麓)·일해(逸海)·서남(瑞南)·애도(艾島) 등 8개 동리가 있다.
[고덕면 古德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48.79㎢, 인구 1만 1065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월훈동이다. 본래 고읍면(古邑面)과 덕암면(德巖面)을 병합하여 1914년 고읍면으로 칭하였다가 일부 동명을 고쳐 1931년 고덕면이 되었다. 면의 북쪽에는 연향산(延香山, 212m)이 있으며, 중앙에는 천주산(天柱山, 142m)이 있다. 남부에는 광대한 간척평야가 있으며, 남쪽의 청천강과 서쪽의 장포천에 접하여 있어 관개에 편리하다.
주요 산업은 벼농사이며, 조·수수·콩 등도 약간 생산된다. 식생은 소나무·아카시아·낙엽송 등이 주종을 이룬다. 일신동에 이상태(李尙泰)를 배향한 신곡사(新谷祠)가 있고, 약수고개에 있는 약수는 소화기질환에 특효가 있다고 전하여진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 교가 있다. 월훈(月暈)·덕원(德元)·관해(觀海)·갈현(葛峴)·일신(日新)·운평(雲坪) 등 6개 동리가 있다.
[고안면 高案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93.04㎢, 인구 1만 6802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소암동이다. 1931년 고현면(高峴面)·신안면(新安面)·동주면(東州面)을 병합하여 고안면이 되었다. 면의 서쪽 경계에 심원산과 독장산이 있으며, 달천강이 중앙을 남동류하여 남부 일대에서 곡류하면서 넓은 충적지를 형성하였다. 달천강 연변의 답작지대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며, 임상(林相)상태가 양호하여 신탄·고사리·버섯류의 생산이 많다. 식생은 소나무·단풍나무·잣나무·낙엽송·가문비나무 등이 침엽수림을 이룬다.
교통은 평북선 철도와 도로가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여 편리하다. 국암사(菊庵祠)는 김영록(金永祿)과 그의 손자 덕연(德淵)을 제향하는 곳이다. 봉명동에는 심원사·상원암(上院庵)·수도암(修道庵)이 있고, 송림이 울창하고 계류가 깨끗하여 풍치가 아름답다. 이 밖에도 안흥동에 무릉탄(武陵灘)과 석수봉(石秀峰), 대양동에 미륵당(彌勒堂), 연봉동에 약수천(藥水泉)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 교가 있다. 소암(小巖)·안흥(安興)·송정(松亭)·대양(大陽)·연봉(延鳳)·어호(漁湖)·송포(松浦)·탄우(灘隅)·용포(龍浦)·심천(深川)·봉명(鳳鳴)·독장(獨將) 등 12개 동리가 있다.
[곽산면 郭山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6.82㎢, 인구 9,310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염호동이다. 본래 곽산군 군면(郡面)이었으나 1913년 정주군과 병합 때 곽산면으로 되었다. 면의 중앙부에는 조산(造山, 128m)이 있고, 남부에는 남산(南山, 122m)이 있으며, 기타지역은 100m 내외의 구릉지를 이룬다.
서쪽 주송강(酒松江) 연변에는 소규모의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어 논농사가 활발하다. 주요 농산물로는 남부와 서부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고, 기타지역에서는 콩·옥수수·수수 등의 밭작물도 생산된다. 식생은 대부분이 침엽수림으로 잣나무·전나무·낙엽송·오리나무 등이 주종을 이룬다. 교통은 경의선이 중앙을 통과하며 도로의 발달도 양호하여 비교적 편리하다.
능한산성은 병자호란·정유재란을 막기 위하여 쌓은 석축성으로 염호동에 성지(城址)가 남아 있다. 남단동과 염호동의 경계에 있는 투구봉 위에는 봉수대의 유적지가 있고, 능한산에는 용연(龍淵)과 자운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 교가 있다. 염호(鹽湖)·남단(南端)·조산(造山)·석(石) 등 4개 동리가 있다.
[관주면 觀舟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95㎢, 인구 6,990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초장동이다. 본래 곽산군 우면(亏面)과 관면(館面)이었으나 1913년 두 면을 병합하여 관주면이 되었다. 중앙에 통경산(通景山, 217m)이 솟아 있고, 기타지역은 200m 미만의 저구릉지를 이룬다. 관삽동 일대에는 간척평야가 넓게 분포하며, 남부해안은 급준한 단애를 이루고 곳곳에 돌출부가 발달하였다.
주요 산물로는 간척평야에서 쌀이 많이 산출되고 조·수수·콩 등의 잡곡도 많이 생산된다. 또한 해안지방에서는 조개·낙지·망둥이 등이 많이 잡힌다. 식생은 가문비나무·낙엽송·소나무 등이 주종을 이룬다. 교통은 경의선이 중앙을 동서로 횡단하고 있어 편리하다.
주암(舟巖)은 남양군도(南洋群島)에서 불상을 싣고 온 배바위로서 길이 3칸, 너비 1칸반이며 배의 형상을 닮았고, 그 옆에는 미륵당이 있다. 관삽동 해변의 승선애(昇仙崖)는 물고기비늘[魚鱗]처럼 생겨 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병풍바위이며, 통경산 중턱의 석굴암(石窟庵)에는 자연석불인 삼존불이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 교가 있다. 초장(草庄)·근담(近潭)·주학(舟鶴)·관삽(觀揷) 등 4개 동리가 있다.
[남서면 南西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66.34㎢, 인구 1만 4101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남양동이다. 1931년 남면(南面)과 서면(西面)을 병합하여 남서면이 되었다. 전지역은 송왕상동의 270m 주봉을 중심으로 100m 내외의 저구릉지를 이룬다. 남쪽 해안의 간척평야와 달천강 연변의 소규모의 범람원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이 산지로서 임산물 생산이 풍부하고 기장·수수·조·옥수수 등의 잡곡이 생산되고 있다. 남쪽 해안지역에서는 조개·낙지·뱅어 등이 많이 잡힌다. 식생은 잣나무·전나무·닥나무·낙엽송 등이 주종을 이룬다. 교통은 경의선이 면의 서북부를 횡단하고 있어 편리하다.
보산동에 문곡사(文谷祠)가 있고 청룡골에는 조헌(趙憲)의 위패를 모신 이택사(麗澤祠)가 있다. 또 화산동의 원수대(元帥臺)는 고려 공민왕 때 이성계가 원나라 덕흥군(德興君)을 맞아 진을 친 곳이다. 선도(蟬島)는 고송과 단층이 절경을 이루며 단 아래의 폭포도 매우 아름답다. 또 서호동의 입암(立巖)과 원통산(元通山)의 약수는 물맛이 좋은 석간수로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 교가 있다. 남양(南陽)·화산(華山)·남호(南湖)·보산(寶山)·상단(上端)·하단(下端)·서호(西湖) 등 7개 동리가 있다.
[대전면 大田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2.82㎢, 인구 9,864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운전동이다. 1913년 운전면(雲田面)과 대명면(大明面)을 병합하여 대전면이 되었다. 북쪽은 천려산(天麗山, 259m)·칠악산 등이 솟아 있어 비교적 높으며 중앙부는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평야지대는 1924년 동인수리조합(同仁水利組合) 몽리구역으로 지정되어 논으로 개량되었으며, 청천강이 남쪽을 연해 흐르므로 관개가 편리하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연 5만석에 달하여 평안북도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교통은 경의선이 면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하고 있어 매우 편리하다. 강서동에는 효자 석천수(石天壽)를 표창한 정문(旌門)이 있고, 하일포(河日浦)는 1904년 일본과 러시아의 국교단절 때 일본군이 상륙하였던 곳이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 교가 있다. 운전(雲田)·운학(雲鶴)·운흥(雲興)·강서(江西)·대흥(大興)·운산(雲山) 등 6개 동리가 있다.
[덕언면 德彦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82.28㎢, 인구 1만 8654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대성동이다. 1931년 덕달면(德達面)·이언면(伊彦面)·아이포면(阿耳浦面)을 병합하여 덕언면이 되었다. 북쪽에는 묘두산이 있고, 남쪽 해안가에는 증봉산(甑峰山, 162m)이 있으며, 동쪽에는 제석산이 위치한다.
서쪽 남서면과의 경계를 따라서 달천강이 남류하여 황해로 들어가며, 장수탄강(長水灘江)은 박천군과의 경계를 따라 남동류하여 대령강(大寧江)으로 유입된다. 달천강 유역에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벼농사가 중심을 이루며, 콩·옥수수 등의 잡곡도 산출되고 있다. 또 남부해안에서는 낙지·망둥이 등이 많이 잡힌다. 식생은 침엽수림으로 소나무·낙엽송·가문비나무 등이 우점종을 이룬다.
교통은 경의선이 남동∼북서로 횡단하고 있어 편리하다. 가마강변(加麻江邊)의 만경대(萬鏡臺)는 문인 김만경(金萬鏡)이 살던 곳이며, 묘두산의 산림과 기암도 절경이다. 덕성동의 동인수리조합의 저수지는 주위가 15리를 넘고 수심이 18척으로 대해(大海)와 같다. 물 가운데 솟아 있는 120여 척(尺)의 굴뚝 모양은 수문개폐소이며, 둑에서 12간의 교량을 통하여 내왕한다. 봄과 여름철에는 유원지가 되어 외래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밖에도 충의단·고장성(古長城)·망해정(望海亭)·봉수산(烽燧山) 등의 고적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 교가 있다. 대성(大成)·원봉(圓峰)·덕성(德星)·육성(六星)·석산(石山)·대산(大山)·신창(新倉)·증봉(甑峰)·방천(防川)·침향(沈香) 등 10개 동리가 있다.
[마산면 馬山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4.39㎢, 인구 1만 665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청정동이다. 1913년 마산면과 서원면(西院面)의 일부를 합하여 마산면이 되었다. 남쪽 대전면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천려산이 있고 중앙 남쪽에 용장산(龍藏山, 300m)이 있어 산세가 험하고 평야지가 적다. 동북쪽의 장수탄강 연변에 일부 답작지대가 있어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옥수수·수수·귀리·콩 등의 잡곡생산이 많다.
식생은 침엽수·활엽수가 혼효림을 이루고 잣나무·전나무·낙엽송 등이 주종을 이루며, 임상의 발달이 양호하여 임산물 생산이 많다. 신오동 오봉산에는 홍경래의 난 당시 7의사를 제향하는 표절사가 있고, 청정동에는 중국사신 당황(唐皇)이 이름을 붙인 납청정이 청려한 풍치를 자랑한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 교가 있다. 청정(淸亭)·동창(東倉)·원서(院西)·원동(院東)·옥야(玉野)·춘산(春山)·신오(新五) 등 7개 동리가 있다.
[안흥면 安興面]
군의 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2.90㎢, 인구 7,278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안의동이다. 본래 곽산군 남면과 서면이었으나 1913년 두 면을 합하여 안흥면이 되었다. 서쪽에는 청암산(靑巖山, 184m)이 있고, 동래강은 선천군과의 경계를 따라 남서류하여 황해로 유입된다. 동래강 연변의 충적지와 안의동 일대의 넓은 평야지대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며, 조·콩·옥수수 등의 잡곡이 산출된다.
또한 남부 해안과 도서에서는 조기·갈치·새우·뱅어·조개 등이 많이 잡힌다. 식생은 잣나무·전나무 등이 주종을 이룬다. 삼단동의 월포도(月浦島)는 250여년 전 홍경우(洪○禹)와 홍총각이 노닐던 곳으로 절경을 이루며, 원통산(圓通山) 아래에는 오천(烏川)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 교가 있다. 안의(安義)·호현(好峴)·암죽(巖竹)·임암(林巖)·삼단(三端) 등 5개 동리가 있다.
[옥천면 玉泉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28.23㎢, 인구 7,889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문인동이다. 본래 곽산군 북면이었으나 1913년 정주군과 합병 때 옥천면이 되었다. 남서쪽에는 검무산(劍舞山, 288m)이 솟아 있고, 중앙 남부에는 지령산(地靈山, 415m)이 있어 300m 내외의 저구릉지를 형성한다. 서쪽 동래강 연변의 소규모 충적지에서 논농사를 하고 있으나 대부분이 밭농사로 콩·옥수수·수수·조 등을 생산한다. 식생은 소나무·낙엽송·가문비나무·아카시아 등이다.
상단동의 개원사(開元寺)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삼불상(三佛像)이 있으며, 서쪽에 월출암(月出庵)과 동쪽에 장경사의 터가 남아 있다. 당하동에는 지령암(地靈庵)과 만경대가 있다. 월옥동의 옥호동약수는 석간수로서 질병에 특효가 있다 하여 국내는 물론 만주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든다. 상단동에는 금광과 금정련소(金精煉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 교가 있다. 문인(文仁)·군산(君山)·월옥(月玉)·상단(上端)·당하(堂下) 등 5개 동리가 있다.
[임포면 臨浦面]
군의 남서부 반도부에 위치한 면. 면적 64.45㎢, 인구 1만 4510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원단동이다. 1931년 임해면(臨海面)과 해산면(海山面)을 병합하여 임포면이 되었다. 남동쪽 반도 끝에 천태산과 범우산(凡于山, 195m)이 있으며, 서쪽 면계에는 사송강이 남류하여 황해로 유입된다.
서쪽 해안선에는 단애가 많으며 많은 섬들이 남북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식생은 소나무·가문비나무·낙엽송 등이 주종을 이룬다. 원하동·고성동·동로동 일대에는 넓은 간척평야가 있어 곡창지대를 이루며, 남쪽은 황해와 접하여 조기·광어·민어·뱅어·가물치 등의 어획고가 높다. 연안의 바다가 멀리까지 얕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기선의 출입은 불가능하나 소형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다.
주요 포구로는 온돌포(溫突浦)·매장포(埋葬浦) 등이 있다. 만경대는 원근바다가 바라보여 절경을 이루며, 천태동에는 목장과 기념비가 있고, 동로동에는 이명재(李命在) 등의 공을 기리는 축포비(築浦碑)가, 원하동에 장경사오층탑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2개 교가 있다. 원단(元端)·염호(濂湖)·원포(遠浦)·천태(天台)·장도(獐島)·고성(古盛)·동로(東路)·원하(元下) 등 8개 동리가 있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시 운전군 오산리·흑록리·광동리·일해리·세마리·오룡리·용산리 일부를 분리하여 정주군에 편입하고 운전군 일신리 일부를 분리하여 오산리에 편입하였다. 그 후 1954년 10월과 1958년 6월 정주군과 운전군 사이에 행정구역의 변화가 있었다. 1994년정주군은 정주시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