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계군 ()

강계고지도
강계고지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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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낭림산맥을 경계로 함경남도의 장진군, 서쪽은 위원군과 초산군, 남쪽은 희천군, 북쪽은 자성군과 후창군, 그리고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의 만주 지방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04′∼127°00′, 북위 40°15′∼41°22′에 위치하며, 면적은 5,403.63㎢로 전국의 군 중에서 가장 큰 군이다. 인구는 21만2350명(1936년 현재)이다. 강계·만포의 2개 읍과 15개 면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강계읍 동부동이다.

자연환경

지세는 동쪽에 낭림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북쪽에는 강남산맥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이어져 있으며, 남쪽에는 적유령산맥이 강남산맥과 나란히 달리고 있어, 군 전역이 거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낭림산맥의 와갈봉(臥碣峰, 2,262m)·사랑봉(舍廊峰, 1,787m)·대홍산(大紅山, 2,214m), 강남산맥의 월기봉(月起峰, 1,238m)과 십이집산(十二輯山, 1,047m)·증봉(甑峰, 1,355m), 적유령산맥의 단목산(檀木山, 1,817m)·비삼봉(非三峰, 1,833m)·적유령(狄踰嶺, 1,969m) 등이 산재하여 있다.

강남산맥과 적유령산맥 사이를 독로강(禿魯江)이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며, 이 독로강과 압록강 유역에 좁은 평야와 강계분지가 형성되어 있어, 군민의 거주지·생산 지대가 된다.

기후는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내륙 깊숙한 고원 지대이므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추위와 더위의 차이가 매우 커, 1월 평균 기온 ·18℃, 8월 평균 기온 23.1℃로 연교차가 41.1℃이며, 연평균 기온은 5.5℃이다. 연 강수량은 935㎜이고, 대개 첫서리는 9월 27일경, 마지막 서리는 5월 13일경에 내린다.

역사

[고 대]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인접한 자성군 장토면 장성동과 토성동에서 신석기의 유물 및 주거지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도 신석기 시대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강계군 공귀동과 풍룡동에서도 민무늬토기·흑도·반달형돌칼·돌도끼·동과(銅戈) 등의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초기 철기 시대에는 중국 전국7웅의 하나인 연(燕)나라 화폐 명도전(明刀錢)이 노남동 등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압록강대안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만주 땅에 옛날 고구려 전성기의 서울이었던 통구(通溝, 일명 황성)가 있고, 이곳에 거대한 광개토왕비와 광개토왕릉으로 짐작되는 장군총이 실존해 있으며, 또 압록강을 끼고 만주와 한반도 쪽에 고구려 고분이 산재해 있는 것을 보면, 위원·강계·후창·자성은 고구려의 근기 지방에 속하여 문물이 발달하고 있었을 것이다.

244년(동천왕 18)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毌丘儉)의 침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고 위군이 계속 침공해 오자 동천왕은 강계·장진·황초령을 지나 동해안의 매구(買溝 : 지금의 文川)에 피난하였다가 위군이 물러가자 북옥저(北沃沮)를 거쳐 국내성에 다시 돌아왔다.

이 때 평양성(平壤城)을 굳게 쌓고 종묘와 사직을 이곳에 옮겼다고 하는데, 이 평양성을 지금의 강계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발해 시대에는 압록부(서경)에 속해 있었다.

[고 려]

발해 멸망 후 만주의 동가강 일대와 압록강 중류 지역인 초산·벽동·위원·강계·자성·후창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발해 유민이 열만화(烈萬華)를 받들어 안정국(安定國)을 건국하고 거란에 대항하였으나 얼마 가지 못하였고, 985년(성종 4) 거란에게 멸망한 뒤 이 지역에는 오랫동안 거란 및 여진이 분산하여 거주하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북진정책을 펴서 성종 때 압록강변까지 도달, 청천강 이북 압록강 이남의 평안북도 서쪽과 평안남도 전역에 이르는 많은 지역을 수복하였다.

1044년(정종 10)에는 압록강구로부터 위원·흥화·삭주·운주·희천·연변을 지나 평안남도의 영원·정융(定戎)·맹주(孟州)를 거쳐 함경남도 정평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하여 국토방위를 견고하게 하였으나, 장성 이북의 벽동·창성·초산·위원·강계·자성·후창 일대는 여전히 야인에게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14세기 중엽 공민왕이 배원 정책을 써서 북진을 계속하게 되면서, 1361년(공민왕 10)독로강(강계의 옛이름)에 만호를 설치하게 됨으로써, 압록강 중류 연안인 창성·벽동·초산·위원·강계의 선까지 수복하였다.

독로강은 그 뒤 1369년의주·이성(泥城)과 함께 만호부를 설치하여 그 이름을 강계로 고치고, 진변(鎭邊)·진성(鎭成)·진안(鎭安)·진녕(鎭寧)의 4군(軍)을 설치하고 상부천호(上副千戶)를 보내어 관할하였다.

[조 선]

1401년(태종 1) 입석(지금의 입관면 입석동)·이언(伊彦) 두 곳을 합하여 석주(石州)라고 하였다가 여진 방어의 중요성에 비추어 1403년강계부로 승격하였으며, 1413년 10월 각 도의 단부(單府)를 도호부로 개칭할 때 강계도호부로 삼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 당시의 호수는 604호, 인구는 4,248인이고, 군정(軍丁)은 익군이 436인, 수성군이 48인이며, 강계도삼익군(江界道三翼軍)은 1,741인이었다.

1442년 3월에 도절제사영을 영변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가, 1446년 1월에 파하여 다시 영변으로 옮겼다. 1450년에 복치하였다가 1453년(단종 1)에 또 파하였다.

그러나 강계는 방어의 요충이고 민사(民事)가 몹시 번거롭고 바쁘다고 하여, 1433년 5월에는 판관을 두고, 또한 1449년 5월에는 문반토관(文班土官), 1462년(세조 8) 7월에는 무반토관을 설치하였다.

세조 초에 4군을 폐하고 우애·자성 2군의 백성을 강계로 옮겼으며, 1457년(세조 3) 10월 익군을 파하고 강계진을 두니, 이산·위원·자성이 이에 속하였다.

1555년(명종 10)에는 부사 박수린(朴秀麟)이 처음으로 강계성을 쌓았다. 1623년(인조 1) 판관을 파하고, 1692년(숙종 18) 우방어사(右防禦使)를 두어 위원·초산의 여러 진보를 겸관하게 하여 직함을 도호부사 겸 강변우방어사라 하였고, 그 뒤 강계도호부사 겸 청북우방어사 강계진병마첨절제사라고 불렀다.

이 당시 강계에는 벌등진(伐登鎭)·고산진(高山鎭)·만포진(滿浦鎭)·평남진(平南鎭)·신광진(神光鎭)의 5진이 있어 강계방어의 전초기지를 이루고 있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11방에 2만 1160호, 인구는 8만 1610인(남 4만 1091인, 여 4만 519인)이었다. 한편, 『강계읍지』에 따르면, 1871년(고종 8) 당시 20면에 호수는 1만214호, 인구는 3만 8699인(남 2만 4194인, 여 1만 4505인)으로 나타나고 있어 두 문헌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근 대]

1866년 병인양요 때 천총(千摠) 양헌수(梁憲洙)가 강계 포수 5백 인을 거느리고, 강화에서 프랑스 침략군을 격퇴하는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1895년 부·군제(府郡制)의 실시에 따라 강계부는 강계·후창·자성·위원·초산·희천의 6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1896년에 다시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강계부는 군으로서 평안북도에 속하였다. 1907년 당시 강계군은 20면에 호수 9,542호, 인구 3만 7308명이었다.

강계는 옛날부터 강변7읍(강계·후창·자성·위원·벽동·초산·창성)이라 하여 평안북도 동북 지역의 심장부에 위치하여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평안북도에서 선천 다음가는 기독교의 고장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4월 8일 김경하(金京河)·한경하(韓炅夏)·정준(鄭儁) 등이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를 일으켰으며, 집회인 수는 5만 35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03년 명신학교(明信學校)·광신여학교(光信女學校)를 설립하여 근대 교육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31년 강계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만주사변 후 일제의 새로운 만주 식민지 경영을 위한 군사적인 목적과 평안북도 내륙의 방대한 천연자원의 개발을 위한 다목적 노선으로, 순천에서 만포에 이르는 만포선이 1939년 2월에 완공되어 강계를 통과함으로써 희천과 더불어 평안북도 오지의 자원과 관광 개발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종착역인 만포는 1945년 5월 자성군 삼풍면의 청수동을 흡수, 만포읍으로 승격하였다. 1943년 5월 현재 호수는 3만 7328호, 인구는 21만 2350명으로 급속적인 인구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강계군은 평안북도의 지리적 특수 조건으로 인해 무장 독립단 활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연표(1930)에 1920년 6월에서 1925년 6월까지 5년간 58회에 걸쳐 충돌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발행)에 의하면, 강계군 출신으로 무장 독립단 또는 독립 운동에 참가하여 순국 내지 전사한 사람만도 이응서(李應瑞)·김용규(金用奎) 등 40명이나 된다.

그 중 이응서는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下縣)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근거로 장기초(張基礎) 등과 같이 의용군 제1중대를 창설하여 강계영림서를 습격하고, 1925년 봄 길림에서 열린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삼부통일대표회의에 북만주 교민 대표로 참석하는 등, 독립 운동에 헌신하다가 1933년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평양감옥에서 사형당한 인물로 이 군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이다.

유물·유적

시대 유적 중 대표적인 것은 공귀리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 및 고분으로, 이곳에서는 돌화살촉·돌검·반달형돌칼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독로강 하류를 중심으로 하여 압록강하류 쪽으로 많은 고분들이 산재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석총이며, 그 분포를 보면 미야동을 비롯하여 무형동·성간동·쌍방동·사득참 등에 20여 기, 동산참·문악동·의진리·인의리·흥주동·풍산동·남산동·춘산동·동부동·하평동·송학동·등공동 등에 40여 기가 있다.

그 밖에 건하동·중동·노남동·미야동 등지에도 각각 10여 기씩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그중 문악동고분은 지름이 9m에서 15m이며, 현실과 연도를 갖춘 대형 고분들이고, 등공동·중동의 고분에서는 돌도끼·돌화살촉·돌검 등과 금속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성곽지로는 강계성을 비롯하여 충암동성터·별하동성터·성량동성터, 향하동 마마해진(馬馬海鎭)성터, 쌍부동성터·구보동성터·노남동성터·북동성터·신창동성터 등 수많은 유적이 있다.

특히, 강계성은 1436년(세종 18) 절제사 이열(李烈)이 축성을 시작하였으며, 1555년(명종 10) 부사 박수린(朴秀麟)이 절반 정도를 완성하였고, 1566년에 부사 유한명(柳漢明)이 개축하였으며, 1739년(영조 15) 부사 김우철(金遇哲) 때 현재의 규모로 완성되었다. 주위 4,425m, 높이 4.8m이며, 성내에 12개소의 우물과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문으로는 북문인 진삭루(鎭朔樓)가 남아 있다. 또한, 1547년(명종 2)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少尹) 일파에게 몰려 강계에 유배되었다가 끝내 풀리지 못하고 6년 후 배소에서 죽은 이언적(李彦迪)의 사적이 남아 있다.

그 밖에 1890년 부사 이용익(李容翊)이 창건한 남산의 거연정(巨然亭), 독로강 절벽 위에 있는 망미정(望美亭), 만포읍 교외의 압록강 기슭 절벽 위에 있는 세검정(洗劍亭), 길다동의 학무정(鶴舞亭) 등 경관이 빼어난 정자가 있으며, 곡하면에는 인제원(仁濟院)이라는 여진의 유적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609년(광해군 1)에 설립된 경현서원(景賢書院)과 1722년(경종 2)에 강계읍에 설립된 향교가 있었다. 1915년에는 서당 95개소, 학생 수 2,358명으로 도내에서 의주군 다음으로 많았다.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사립 명신학교(明新學校)로, 이곳의 유지인 이학면(李學勉)이1904년〉에 설립한 것이다. 같은 해 광신여학교(光新女學校)가 세워지면서 그 뒤에 일신학교(日新學校)·협신학교(協新學校)·청원학교(淸源學校)가 세워졌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에 영실중학교(英實中學校)가 4년제 학교로 설립되었는데, 초대교장은 캠벨(Campbell, A.)이며 미국 북장로교의 후원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37년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1939년 제적 학생을 선천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편입시키고 문을 닫았다.

같은 해 한국인·일본인 공학으로 평안북도에서 첫 번째인 강계공립중학교가 세워졌다. 1935년에는 4년제의 강계농림학교가 건립되어 농업기술교육에 이바지하였고, 1945년에는 강계여자농업학교가 세워졌다.

공립보통학교로는 1904년에 향교 건물을 빌려서 세운 강계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하여 8개교가 있었고, 강계공립보통학교는 광복 당시 학생 수가 3천 명에 이르렀으며, 특히 이 학교에는 간이중학교가 있어서 2년제 고등과·토목과 두 과정을 가르쳤다.

종교 기관으로는 불교 사찰이 한때 72개나 있었다고 하나, 1935년의 통계에 의하면 6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그중 1750년(영조 26)에 세워진 오남사(午南寺)가 유명했다고 한다.

천주교는 1927년 이후에 들어왔으며, 개신교는 1899년 김윤붕(金潤鵬)이 최초로 교인이 된 이후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1902년에 교인 80여 명이 돈을 모아 최초의 교회인 동문밖교회를 세웠고, 그 뒤 1910년에 남장대예배당이 세워졌다.

이때 활약하였던 사람은 미국인 목사 캠벨로, 그는 1910년에 와서 1935년에 추방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개신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이 일어나 여러 학교가 세워졌으며, 주예지(柱禮智)로 개명한 서양 선교사가 1909년에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 지방에 전하는 설화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위원산(渭原山)이야기가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독로강가에 호랑개벌이라는 들이 있고, 이 들 가운데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생긴 조그마한 야산이 있다. 이 산은 본래 산이 많은 위원 지방에 있었는데, 어디든 산 없는 고장에 가서 명산 노릇을 하고 싶어서 학(鶴)에게 옮겨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학이 그 산을 발로 움켜 쥐고 날아올라 독로강 상공에 이르렀을 때, 빨래하던 아낙네들이 보고 “산이 날아온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학이 놀라 발로 움켜 쥐었던 산을 그만 놓아 버렸다. 그랬더니 산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벌판에 떨어져 바가지를 엎어 놓은 모양의 조그마한 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산은 본래 위원에 있던 산이라 하여 위원의 원이 강계 고을에서 해마다 산세를 받아 가므로 강계 사람들의 불평이 컸다.

그러던 차에 어느 원이 새로 부임해서 이런 사실을 알고 산세 받으러 온 사람에게 “저 위원산은 우리 고을에 필요가 없으니까 도로 가져가라.”고 하면서 산세를 물지 않고 산세 받으러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냈다. 그 뒤부터는 산세를 받으러 오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산업·교통

군의 대부분이 산지이므로, 구릉의 경사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로 삼았다. 평야가 적어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활발해, 쌀은 자급하기에 부족하지만 조·콩·대마의 산출이 많으며, 옥수수·감자·메밀의 생산량도 적지 않다. 또, 농가의 부업으로 양계·양돈·축우가 비교적 성하다. 특히, 강계의 소는 예로부터 품종이 우수하기로 유명하다.

광업은 인상흑연(鱗狀黑鉛)·금·무연탄 등이 채굴되며, 특히 동방(東邦)·시중(時中)·승영(勝榮) 등 세 광산의 흑연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산지 전역에 삼림이 울창하며, 그 일부는 원시림의 대수해를 이루고 있다. 연간 약 15만㎡의 목재가 채벌, 반출되고, 독로강 유역에서는 압록강재의 약 50%가 생산된다. 만포에는 동양 굴지의 만포제재소가 있고, 중암역전(仲巖驛前)에는 특수제품 가공 공장으로 널리 알려진 중암제재소가 있다.

상업 활동의 경우 상설 시장은 없고, 모두 5일 정기장이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1830년대에 강계 서부의 평리면에 하청장(河淸場)이, 시상면에 전평장(錢平場)이 5일장으로 열려, 과일·채소·곡물류와 그릇·동물 가죽·가축 등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또,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902년에는 입석시장(立石市場)이 2일과 7일에 열렸다고 한다.

1926년 이후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강계시장·만포시장, 용림면의 남흥시장(南興市場)과 신창시장(新昌市場), 전천면의 무주시장(武州市場), 성간면의 별하시장(別河市場) 등이 열렸다.

그 중 대표적인 시장이 강계시장과 만포시장이다. 강계시장은 강계읍내에 2일과 7일에 열렸으며, 5천 평 정도의 장터에 1천여 명의 장꾼들이 모여들어, 주로 잡곡류·잡화류·짐승 가죽 등을 거래하였다. 만포읍의 만포시장은 4일과 9일에 열렸으며, 만포철도가 개통되면서 크게 발달하게 되었고, 주로 농산물 거래가 이루어졌다.

교통은 철도가 발달해 만포선(滿浦線)과 장진선(長津線)이 지나간다. 1939년 개통된 만포선(순천∼만포진, 296.8㎞)은 남쪽 군계의 구현령(狗峴嶺, 815m)을 넘어 군내를 북상하여 강계읍을 거쳐서 만포진에 이르며, 연안의 교통과 연안 개발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장진선은 강계읍에서 아득령(牙得嶺, 1,479m) 북쪽을 넘어 장진군의 동문거리에 이르는데, 평안북도와 함경남도를 연결해 주는 구실을 한다. 주요 도로는 대체로 이 두 철도와 병행한다.

2등도로가 만포선을 따라 남쪽으로 구현령을 넘어 희천·안주 방면으로, 북으로도 역시 만포선을 따라 만포진과 자성 방면으로 통해 있다.

그리고 도중에 전천면에서 북쪽의 위원으로, 입관면에서 동남의 장진읍으로 각각 지선도로가 나 있고, 그 밖에 강계읍에서 동북쪽으로 백삼봉(白三峰, 1,556m)의 남쪽을 넘어 후창·자성 방면에 이르는 지방도로가 있다. 그러나 아직 지방의 각 면 소재지에 이르는 교통은 불편한 상태이다.

읍·면

[강계읍 江界邑]

군의 중심부에 있는 읍. 인구 3만81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본동이다. 강계군의 중심지로, 본래 동면(東面)과 서면(西面)으로 나뉘어 있던 것을 1914년 병합하여 강계면이라 하였고,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의 중심부는 남산을 주봉으로 하여 500m 내외의 고원성 산지이고, 북부에는 북천이 남서류하여 독로강에 유입되며, 서쪽 경계에는 독로강이 북류하면서 연변에 약간의 충적지를 형성하여 논농사 지대가 전개된다. 남부에는 남천(南川)이 서류하여 독로강에 흘러든다. 남천 연변의 강계미는 질이 좋기로 평안북도 내에서 유명하다.

농업은 밭농사 중심으로 감자·콩·조·메밀·옥수수 등이 주산물이며, 그 밖에 대마·팥 등이 약간 생산된다. 가문비나무·전나무·잣나무·낙엽송 등의 침엽수림이 우거져 있어 원목·잣·버섯·고사리·가래·장작·숯 등 임산물이 풍부하다.

주요 명승지로는 남산의 거연정·망미정·인풍루(仁風樓)와 강계성(江界城)이 있으며, 강계산 유기(鍮器)는 특산물로 유명하다.

본(本)·화천(和泉)·학견(鶴見)·일출(日出)·남산(南山)·궁하(宮下)·수(壽)·금(錦)·소화(昭和)·황금(黃金)·대화(大和)·성산(城山)·북천(北川)·유(柳)·영(榮)·행(幸)·천석(千石)·동부(東部)·고당(古堂) 등 19개 동이 있다.

[만포읍 滿浦邑]

군의 북서부에 있는 읍. 인구 2만2421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문흥동이다. 1669년(현종 10)에 만포진을 설치하였으며, 그 뒤 진을 폐하고 외귀방(外貴坊)에 편입되었다. 이어서 1867년 외귀로부터 분리하여 문옥면(文玉面)을 설치하였고, 만포선이 개통되던 무렵 만포읍으로 승격되었다.

북부의 월기봉, 남부의 사암봉(寺巖峰, 646m)·삼지봉(三枝峰, 503m)·감토봉(甘土峰, 658m) 등과 같은 600m 이상의 산들이 연이어 있고, 북부에는 압록강이 남서류하고 있으며, 많은 세천(細川)들이 압록강에 합류되고 있다.

이 지역은 자강고원(慈江高原) 가운데에서 비교적 낮고 평탄한 지역으로, 산록에서는 감자·콩·옥수수·조·메밀·기장 등의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많으며, 주요 수종은 적송·전나무·가문비나무·낙엽송·자작나무·두릅나무·고로쇠나무·붓나무 등이고, 특히 적송과 삼송이 유명하고 버섯·고사리·원목·장작·숯·도라지 등의 생산이 많다. 특히, 압록강의 수운을 이용한 원목 운반의 집산지로 삼림철도인 만포선이 부설되어 있다.

주요 명승지로는 압록강변의 절벽에 있는 장군 박남흥(朴南興)의 전공을 기리고 기념하는 세검정과, 문악동의 고구려 시대 고분 역시 압록강변에 있는 수릉정(受陵亭) 등이 있다. 문흥(文興)·문악(文岳)·옥(玉) 등 3개 동이 있다.

[간북면 干北面]

군의 동부에 있는 면. 인구 9,02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남동이다. 옛날에는 성간방(城干坊)에 속하였다가, 1909년에 면으로 개편되었다.

북쪽의 향래봉(香萊峯, 1,728m)과 중앙의 사립봉(師笠峰, 1,280m)·전무봉(全武峰, 1,426m)·속사산(束沙山, 1,415m), 동쪽의 맹부산(猛扶山, 2,214m)·인재백산(人在白山, 1,813m), 남쪽의 단목산 등과 같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원 지역 사이를 간북천(干北川)이 서류하여 깊은 협곡을 형성하고 있다.

간북천변에는 약간의 충적지가 있어 논농사가 이루어지나, 기타 지역은 1천m 이상의 험한 고원성 산지로 임산물의 생산이 많으며, 특히 고사리·버섯·두릅·장작·숯·원목 등의 생산이 많다.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져, 옛날 화전이었던 산전에서 감자·콩·옥수수·메밀 등의 생산이 이루어진다. 특산물로는 산삼·양봉·고랭지 배추 등을 들 수 있다. 명승지로는 옛 성터인 간북진이 북동성심참(北洞城深站)에 있다. 교통은 군내에서 가장 불편한 곳이다. 남(南)·북(北) 2개 동이 있다.

[고산면 高山面]

군의 서부 끝에 있는 면. 인구 1만218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포상동이다. 1669년(헌종 10)에 고산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어 평시에는 행정·사법·경찰사무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진을 폐하고 방이라 칭하였고, 1909년 고산면으로 승격되었다.

강계고원 산지 중에서 600m 내외의 저지대를 형성하며 북서부쪽의 포산(浦山, 606m), 동쪽의 미타산(美他山, 765m), 남쪽의 대암산(大巖山, 715m)·봉산(鳳山, 798m) 등이 있고, 그 남쪽면 경계 지대를 독로강이 심한 감입곡류(嵌入曲流)를 하면서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북부에는 우리 나라 최장인 압록강이 흐르고 있으며, 그 강변에는 넓은 백사장이 있다.

논농사는 독로강변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지며, 대부분은 밭농사로 콩·옥수수·밀·기장 등이 재배된다. 식생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혼재하는 혼합림으로 잣나무·전나무·단풍나무·박달나무·상수리나무·참나무·낙엽송·떡갈나무·느티나무 등이 중심 수종이다. 주요 임산물은 버섯·고사리·숯·장작 등이며, 압록강은 임산물 반출 시 뗏목을 통한 수운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명승지로는 연하동의 걸쌍약수(傑雙藥水)가 유명하며, 조선조 현종 때 포상동을 방위하기 위해 구축하였다는 고산진성터와, 미타동압록강변에 조선조 순조 때 세웠다는 영벽정(映碧亭)이 있다. 포상(浦上)·연상(延上)·연하(延下)·남상(南上)·춘산(春山)·미타(美他) 등의 6개 동이 있다.

[곡하면 曲河面]

군의 서부에 있는 면. 인구 2,34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쌍부동이다. 본래 곡하방(曲河坊)이라 불려 오다가 1909년에 곡하면으로 개칭되었다.

서쪽의 무학산(舞鶴山, 1,084m), 동쪽의 십이집산·호암산(虎巖山, 851m)·자북산(子北山, 863m), 남쪽의 대웅산(大熊山, 1,121m)과 같은 800m 이상의 험준한 고원성 산지 사이를 감입곡류인 독로강이 북서류하여 압록강에 흘러 들어간다.

독로강변에 약간의 충적지가 있어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기타 지역에서는 밭농사 중심으로 감자·고구마·콩·옥수수·수수·메밀 등의 작물이 재배된다. 식생은 침엽수림이 중심 수종으로 낙엽송·잣나무·전나무·적목·피나무·엄나무·자작나무 등이 자라며 대수해를 이루어, 잣·버섯·고사리·두릅·각종 약재의 표피 등 임산물의 생산이 많다.

특산물로는 양봉 꿀이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백청(白淸)은 꿀 중의 꿀로 손꼽힌다. 또, 남쪽의 더운 지방의 배추와 전혀 다른 독특한 맛을 내는 강계배추의 산지로서 유명하다.

명승지로는 여진 전성기에 처녀를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냈다는 옛터인 인제원이 남아 있다. 쌍부(雙富)·의진(義眞)·쌍신(雙新)·흥주(興州) 등 4개 동이 있다.

[공북면 公北面]

군의 동부에 있는 면. 인구 1만578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공인동이다. 본래 입석방에 속하여 있다가 약 130년 전에 전천면(前川面)으로 분리, 개편되었다.

북쪽의 천화산·덕령봉(德嶺峰, 1,515m)을 중심으로 하여 면 중앙에 승방산(勝芳山, 1,057m)·황철산(黃鐵山, 1,127m) 등이 솟아 있고, 이들 1천m 이상의 고원성 산지 사이를 감입곡류인 남천이 동류하면서 면 남부를 흐르는 독로강에 흘러들고 있다.

이 강변에는 강을 따라 좁고 긴 충적지가 형성되어 논농사가 이루어져 약간의 쌀 생산이 있고, 그 밖의 지역은 임야지로 잣나무·소나무·전나무·낙엽송·참나무·박달나무·가래나무 등의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을 이루어 산림이 우거졌으며, 원목·산삼·고사리·고비·더덕·도라지·두릅 등과 같은 임산물의 생산도 많다. 특산물로는 감자·산삼·배·양봉 꿀이 있으며, 특히 쌈을 싸 먹는 고산식물인 민봉참나물이 유명하다.

명승지로는 1684년(숙종 10)에 축조된 마마해진이 있다. 공인(公仁)·향하(香河)·승방(勝芳)·부지(富只)·두흥(斗興) 등 5개 동이 있다.

[성간면 城干面]

군의 남부 중심에 있는 면. 인구 1만461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별하동이다. 본래, 성간방이라 칭하여 2개 이로 구분하고 2개소에 창(倉)을 설치하였으며, 약 130년 전 간상(干上)·간하(干下) 두 개의 면으로 분리하였다가, 1914년 간하면 마지동(馬只洞)을 제외하고 오모로동·서동을 병합, 성간면으로 개편했다.

서부에 두릉봉(頭陵峰, 1,336m), 남부에는 비삼봉·운암산(雲巖山, 1,598m)·도마봉(道摩峰, 1,526m) 등이 솟아 있어 고원성 산지를 이루고 그 사이로는 간북천이 서쪽으로 흐르며, 기타 많은 하천들이 북서류하여 면의 중앙을 동류하는 독로강에 합류된다.

이들 모든 하천변에는 좁고 긴 충적지가 분포하여 약간의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밖의 지역은 800m 이상의 고원성 산지로 침엽수림의 임야지가 대부분이고, 그 산록에서는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감자·콩·옥수수·메밀 등이 재배된다.

식생은 건축·가구·펄프 등의 재료인 침엽수 수종이 주로 많고, 기타 활엽수와 혼합림을 이룬다. 주요 수종은 전나무·잣나무·피나무·엄나무·박달나무·분비나무·단풍나무·느티나무 등이고, 주요 임산물은 고사리·버섯·도라지 등이다. 주요 특산물은 양봉 꿀·산삼·배추 등이고 배도 생산된다. 별하(別河)·쌍방(雙芳)·외중(外仲)·서(西)·오모로(梧毛老) 등 5개 동이 있다.

[시중면 時中面]

군의 북서부에 있는 면. 인구 8,85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외시천동이다.1404년(태종 4) 금천관(錦川館)이라 칭하고, 1661년(현종 2)에는 시상면(時上面)으로, 1774년(영조 50)에는 시상면을 2개 면으로 나누어서 시상면·시하면이라 부르다가, 1912년에 시상·시하를 통합하여 시중면으로 개칭하였다.

북부에 천제봉(天祭峰, 651m), 남부에 인재봉(人才峰, 509m)·검문봉(劒門峰, 713m)·점암산(點巖山, 799m) 등이 있고, 그 사이를 감입곡류인 독로강이 서류하여 압록강에 흘러든다.

북부의 외시천이 독로강과 만나는 유역에 충적지가 발달하여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기타의 지역은 600m 내외의 산들로 밭농사가 중심이며 감자·귀리·콩·옥수수·조·메밀 등이 재배된다.

식생은 가문비나무·적목·전나무·낙엽송·피나무·엄나무·두릅나무·참나무·가래나무·시닥나무·붓나무·박달나무 등 침엽수와 활엽수가 혼재하며, 산림이 우거져 건축·가구용의 원목과 신탄·고사리·버섯 등의 임산물 생산이 많다. 주요 특산물은 산삼·양봉 꿀·홍송 등이다. 외시천(外時川)·노남(魯南)·심귀(深貴)·내(內)·안찬(安贊) 등 5개 동이 있다.

[어뢰면 漁雷面]

군의 서부에 있는 면. 인구 7,94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풍룡동이다. 본래 어뢰방(漁雷坊)이었으나, 1909년 어뢰면으로 개편되었다.

북쪽의 점암산·검문봉, 남쪽의 증봉 등의 높은 산들이 있고, 그 사이를 작은 내가 북서류하여 독로강에 흘러들며, 그 천변에는 약간의 충적지가 있어 벼농사가 이루어진다.

기타 지역은 600m 이상의 산지로 자강고원 중에서는 비교적 낮고 평평한 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콩·옥수수·감자·조·메밀·기장 등 밭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식생은 전나무·적송·낙엽송·가문비나무·피나무·엄나무·박달나무·단풍나무·도토리나무 등이 많아 침엽수와 활엽수가 혼재하고 있으며, 목재나 건축용의 원목이 많이 생산된다. 고원 지대로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어 토지 이용도가 낮다.

주요 명승지로는 천성동에 있는 2단폭포인 용수덕폭포(瀧水德瀑布)를 들 수 있는데, 구룡폭포·박연폭포와 더불어 북한의 3대 폭포 중의 하나이며, 특히, 가을 단풍철이 더욱 절경이다. 풍룡(豐龍)·천성(天城)·종인(從仁)·풍청(豐淸) 등 4개 동이 있다.

[외귀면 外貴面]

군의 북서부에 있는 면. 인구 8,25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건하동이다. 조선 시대에는 외귀방이라 하다가, 대한제국 시대에 문옥면(文玉面)과 외귀면으로 분리되었고, 1914년 건상·건하·이남·흥판의 4개 동을 외귀면으로 하였다.

서쪽의 삼지봉·후고산봉(636m)·향산곶봉(香山串峰, 657m)을 비롯하여 남쪽의 천제봉 등의 높은 산들이 솟아 있어서 교통이 매우 불편하고, 삼걸령·약수령·안소두령·추동령 등의 많은 고개가 있어 분지성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북쪽에는 건포천이 남서류하여 독로강에 흘러들며, 그 강변에 좁고 긴 띠 모양의 충적지가 분포하여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타 지역은 600m 이상의 고원성 삼림지이므로 임산물의 산출이 많으며, 산록에서는 조·콩·옥수수·수수·메밀·기장·감자·고구마 등 밭농사 중심의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식생은 전나무·가문비나무·적송·낙엽송·물푸레나무·참나무·단풍나무 등이고, 침엽수와 활엽수가 혼재하고 있다.

주요 명승지로는 탄산 약수인 흥판동의 외귀약수(外貴藥水)와 이남동의 광암약수(廣巖藥水)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약수터를 찾는다. 건하(乾下)·흥판(興判)·건상(乾上)·이남(吏南) 등 4개 동이 있다.

[용림면 龍林面]

군의 서남부 끝에 있는 면. 인구 1만123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창동이다. 본래 입석방의 일부였던 것을 화피면(樺皮面)이라 개칭하였고, 뒤에 다시 용림면이라 개칭하였으며, 1894년에 일부를 분할하여 따로 광성면(廣城面)을 설치하였고, 1909년 서면(西面)을 병합, 용림면에 편입하였다.

북쪽의 인재백산·단목산·대홍산 등을 중심으로 한 고석곡산(古石谷山, 1,871m)·민색봉(閔塞峰, 1,845m)·동곡산(東谷山, 1,520m)·대다산(大多山, 1,464m)·안석산(安石山, 1,362m)·고암산(高巖山, 1,239m) 등의 고산준령이 연이어 있는 고원성 산지로, 그 협곡 사이를 후지강(厚地江)과 진동강(鎭同江)이 남류하여 독로강에 합류되며, 그 강변에는 좁고 긴 띠 모양의 좁은 논이 형성되어 약간의 벼가 생산된다.

기타 지역은 침엽수림의 대수해를 이루어 임산물의 생산이 많다. 주요 수종은 가문비나무·전나무·낙엽송·향나무·자작나무·피나무·엄나무·창나무·박달나무 등이고, 주요 임산물은 가래·잣·두릅·고사리·버섯·장작·숯·신탄·원목 등이다.

주요 산업은 밭농사가 중심이며 감자·콩·옥수수 등이고, 주요 유적지로는 1671년(현종 12)에 세운 앙청(秧廳)이 신창동에 있다. 신창(新昌)·광성(廣城)·남흥(南興)·용운(龍雲)·용림(龍林)·후지(厚地) 등 6개 동이 있다.

[이서면 吏西面]

군의 북부에 있는 면. 인구 6,23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학동이다. 원래 종포진(從浦鎭)이었는데, 120년 전 이서면으로 개편했다.

북쪽의 월기봉, 서쪽의 구요산(駒腰山, 882m), 남쪽의 용사암자(龍四巖子, 1,158m) 등의 고산이 있고, 그 사이를 건포천이 남류하여 흐르며, 그 천변에 약간의 충적지가 있어 좁고 긴 띠 모양의 논농사 지대가 분포하고 있다.

그 밖의 지역은 600m 이상의 산지인 자강고원이 있어 대부분 임야지이고, 그 산록에서 약간의 감자·콩·조·옥수수·메밀 등의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식생은 침엽수이고 기타 활엽수도 혼재하는데, 전나무·적송·가문비나무·낙엽송·자작나무·두릅나무·참나무·상수리나무·단풍나무·물푸레나무 등이 중심 수종이고, 임상이 양호하여 버섯·장작·숯·원목 등 임산물의 생산이 많다.

유적으로는 종포동에 1669년(현종 10)에 축조된 종포진성(從浦鎭城)이 있다. 송학(松鶴)·등공(登公)·함부(咸富)·송하(松下) 등 4개 동이 있다.

[입관면 立館面]

군의 남부에 있는 면. 인구 1만224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문동이다. 예로부터 입석방의 중심부였으며, 170여 년 전 입관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쪽의 운암산, 남쪽의 조산봉(造山峯, 1,475m)을 중심으로 면의 중앙에는 봉천봉(鳳泉峯, 1,249m)이 우뚝 솟아 있고, 독로강이 면의 중앙을 북서류하여 압록강에 흘러 들어간다. 감입곡류인 독로강은 그 강변에 반달 모양의 충적지를 형성하며, 이곳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북서쪽의 화경천 유역(化京川流域)에서도 약간의 논농사가 행해진다.

그 밖의 지역은 1천m 이상의 험한 산지로,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을 이루어 가문비나무·잣나무·낙엽송·자작나무·피나무·엄나무·박달나무 등의 삼림 지대로, 원목·신탄·장작·숯·고사리·버섯 등의 임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산록의 전작지에서 감자·옥수수·콩·조·메밀 등이 재배되며, 주요 특산물은 산삼·양봉 꿀·모피 등이다.

명승지로는 1669년에 지은 성터인 신광진(神光鎭)이 창평동에 남아 있다. 용문(龍門)·화양(化陽)·창평(倉坪)·운송(雲松)·천산(天山) 등 5개 동이 있다.

[전천면 前川面]

군의 남서부에 있는 면. 인구 1만409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장흥동이다. 본래 입석방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부터 130여 년 전 전천면으로 분리, 개편되었으며, 강계와 만포 다음으로 발전된 곳이다.

북쪽에 연덕산(淵德山, 1,730m)·현주방산(峴朱方山, 845m), 남쪽에는 대음산(大陰山, 1,185m)·호암산(虎巖山, 1,221m) 등이 솟아 있으며, 면의 중앙에는 호양산(虎養山, 1,181m)·백천봉(白天峯, 983m)·염불동산(念佛洞山, 930m) 등이 있고, 그 협곡 사이를 전천(前川)이 남서류하여 면의 서부를 북류하는 독로강과 합류한다.

합류 지점에 하천 충적지가 분포하여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기타 지역은 8백m 이상의 고원성 산지이므로 농작물의 재배가 부적당하나, 산록 연변에서 밭농사가 이루어져 콩·감자·옥수수·메밀 등이 재배된다.

식생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혼재하며, 중심 수종은 가문비나무·잣나무·피나무·엄나무·참나무·박달나무·고로쇠나무·도토리나무·구름나무·느티나무·싸리나무·진달래 등이고, 임산물의 생산도 풍부하여 원목·숯·장작·신탄·버섯·고사리·도라지 등이 많이 생산된다.

주요 명승지로는 옛 성터인 성현암(城峴巖)이 중암동에 있고, 창덕동에 약수터가 있으며, 독로강변 2㎞ 지점에 있는 종유동(鍾乳洞)인 풍혈(風穴)은 그 경치가 영변의 동룡굴에 버금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흥(長興)·창덕(倉德)·중암(仲巖) 등 3개 동이 있다.

[종남면 縱南面]

군의 북동부에 있는 면. 인구 9,89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한전동이다. 1699년(숙종 25)에 추파진(秋坡鎭)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가, 1894년 진을 다시 종남면으로 개편하였다.

사덕산(寺德山, 1,354m)·금파산(金把山, 1,316m)·오봉산·백삼봉·천화산(天火山, 1,341m) 등의 1,000m 이상 되는 고원성 산지 사이를 북천이 남서류하면서 독로강에 흘러든다.

면의 대부분은 입목 축적이 양호한 임야지를 이루고 있어 잣나무·전나무·가문비나무·낙엽송 등의 침엽수림이 주종을 이루고 있고, 기타 물푸레나무·참나무·상수리나무 등의 활엽수도 혼재하여 임산물의 생산이 많다.

특히, 원목·장작·숯·고사리·버섯 등이 많이 생산된다. 면의 서남쪽 북천 연변에는 넓은 충적지가 전개되어 비교적 쌀의 생산이 많은 편이다. 밭작물로는 감자·콩·옥수수·조·메밀 등이 생산된다. 주요 특산물은 배와 양봉 꿀이고 배추도 많이 생산된다.

유적지로는 1669년 구축된 것으로 현재는 성터만 남아 있는 추파진이 있다. 한전(閑田)·원평(院坪)·성장(成章)·장평(長坪) 등 4개 동이 있다.

[종서면 從西面]

군의 북부에 있는 면. 인구 6,13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성동이다. 원래 종포방(從浦坊)에 속하였다가 약 130여 년 전 종서면으로 승격되었다.

북쪽의 월기봉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금파산·오룡산(五龍山, 1,060m), 남쪽에는 온정산(溫井山, 669m)이 있고, 이 산들 사이를 옥류천이 남류하여 북천과 만나서 독로강에 흘러 들어간다.

깊은 협곡을 이루는 세천의 연변에 좁고 긴 모양의 작은 논이 있어서 소량의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밖의 지역은 대부분 잣나무·전나무·가문비나무·들매나무·박달나무·도토리나무·고로쇠나무 등과 같은 침엽수림 중심의 대수해를 이루어 원목·땔감·잣·버섯·고사리 등과 같은 임산물의 생산이 많다.

고원성 산지의 산변부에는 감자·콩·옥수수·메밀·팥과 같은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특산물로는 산삼·양봉 꿀 등이 있다. 신성(新城)·종포(從浦)·황청(黃淸) 등 3개 동이 있다.

[화경면 化京面]

군의 남서부에 있는 면. 인구 1만409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고인동이다. 원래 입석방의 일부 지역에 속해 있던 것을 130여 년 전 화경면으로 분리, 개편하였다.

북쪽의 봉전산(蓬田山, 1,285m)·대음산(大陰山, 1,285m), 서쪽의 숭적산(崇積山, 1, 994m), 남쪽의 망종산(望宗山, 1,450m)·두룡봉(頭龍峰, 1,173m), 동쪽의 팔봉산(八峯山, 1,456m)·직곡산(直谷山, 1,520m) 등과 같은 1,000m 이상의 고원성 산지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남서쪽의 화경천이 면의 중앙을 북동류하여 독로강에 흘러 들어간다.

이 천변에는 약간의 충적지가 분포하여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대부분의 작은 내들은 이차성 하천으로 화경천에 흘러든다. 면의 대부분 지역이 고원성 산지로 침엽수림의 대수해를 이루어 분비나무·가문비나무·적목·낙엽송·노가지향나무·자작나무·피나무·엄나무·참나무·박달나무 등의 수목이 많고 임상이 양호하여 고사리·고비·수리취·더덕·도라지·달래·원목·땔나무 등의 임산물 생산이 많다. 농업은 산록의 밭농사가 중심으로 콩·옥수수·수수·메밀 등의 잡곡 생산이 많다.

주요 특산물은 산삼·익모초·배 등이다. 명승지로는 신적동에 천연 약수가 있어 인근에서 사람이 많이 모여들며, 길다동독로강 기슭에 있는 태수정(太守亭)과 학무정은 주변의 노송의 풍치와 기암괴석과 더불어 널리 알려져 있다. 고인(古仁)·진평(津坪)·이만(梨滿)·길다(吉多)·신적(新積)·황린(黃麟) 등 6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광복 당시 2개 읍 15개 면에서 1949년 1월 자강도를 신설하면서 어뢰·곡하·종서·종남·공북·강계·동문 등 7개 면만으로 강계군을 재편성하였다. 1949년 12월 행정구역 개편 때 강계읍을 강계시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나머지 면만으로 장강군을 신설하고, 강계군은 폐지하였다.→강계시,장강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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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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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국지리』(강석오, 1971)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강계군지(江界郡誌)』(강계군지편찬위원회, 1974)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1)
『북한교육기관 및 문화재현황』(국토통일원, 1983)
『북한행정구역 및 산천지세』(국토통일원, 1983)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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