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강서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강서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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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동군·중화군과 마주보고 있으며, 남쪽은 용강군, 서쪽은 서한만(西韓灣), 그리고 북쪽은 평원군과 서로 접하고 있다. 동경 125°12′∼125°32′, 북위 38°47′∼39°12′에 위치하며, 면적 735.64㎢, 인구 약 14만 3687명(1944년 현재)이다. 14개 면 160개 리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강서면 덕흥리이다.

자연환경

해안을 따라 서북쪽에 석다산(石多山, 271m)이 있고, 서남쪽에 운룡산(雲龍山, 356m)·봉황두산(鳳凰頭山), 동남쪽에 무학산(舞鶴山, 346m)·서학산(棲鶴山, 272m) 등이 솟아 있으며, 이 밖에 왕등산이 있다.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야지대이다.

평야를 흐르는 작은 하천들은 대개 서해로 흘러들어 가지만, 동부지역의 광탄천(廣灘川)·수교천(水橋川) 등은 대동강으로 흘러든다. 서한만의 연안에는 포구도 있으나 교통과 어업에는 그다지 이용되지 못하고 있으며, 보림면의 보산항(保山港)은 해로로 활용되었다.

다만 여러 곳에서 간척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대동강 하류의 하중도(河中島)인 합도(蛤島)에는 8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이들에 의해 논밭이 개관되었다. 함종면에서 해안으로 810m 지점에는 이압도(二鴨島)와 북조압도(北漕鴨島)가 있는데, 북조압도에는 특히 어항이 발달되어 있다.

이 밖에도 소당도(素堂島)·무도(巫島)·초도(草島)·소초도(小草島)·전도(箭島) 등의 섬이 서해에 있다. 기후는 대체로 대륙성기후에 속하나 해양에 접해 있으므로 기온은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기온 10.2℃, 1월 평균기온 -6.9℃, 8월 평균기온 25.2℃이며, 연강수량은 818㎜로 전국적으로 보아 과우지(寡雨地)에 속한다. 대개 10월 24일경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다음 해 3월 30일이면 녹게 된다.

역사

[고 대]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동진면 태성리에서 1957∼1958년에 걸쳐 주거지 1기, 고인돌 2기, 고분 등이 조사되었으며, 강서면 삼묘리와 동진면 태성리 등에서는 고구려의 벽화고분이 다수 발견되었다.

압록강 중류 동가강(佟佳江)가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고구려의 세력이 이 군에 미친 것은 4세기 초 미천왕 때의 일로 생각되며, 장수왕의 평양천도로 고구려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강서군의 고구려고분은 그러한 사실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자, 당나라 군사의 약탈과 통일신라의 평양 포기 결과, 이 군도 통일신라의 세력이 미치지 않게 되어 황폐하여졌다.

[고 려]

고려가 건국되고 북진정책을 써서 평양을 수복하고 서경(西京)으로 삼자, 본래 비옥한 이 군은 다시 활발하게 개척되었다. 현종 때의 지방행정구획정비로 서경 주변의 특수행정지역인 서경기(西京畿)에 속하게 되었다.

인종 때에는 서경천도(西京遷都)·칭제건원(稱帝建元)의 자주정책을 내세우다가 열세에 몰리게 된 묘청(妙淸) 등 서경파(西京派)가 1135년(인종 13)에 난을 일으켰으며, 이에 따라 병화가 미치었다. 묘청의 난이 평정된 뒤, 1136년 서경기를 분할할 때 이악(梨岳)·대구(大垢)·갑악(甲岳)·각묘(角墓)·독촌(禿村)·증산(甑山) 등 6개 향(鄕)을 합해 강서현을 설치하고 현령을 파견하였다.

이는 묘청의 난의 근거이던 서경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주변의 부곡(部曲)이나 향을 묶어서 중앙에서 직접 지방관을 파견해 관장하게 함으로써 고려의 정규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때부터 이 곳은 비옥한 농업지대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게 되었다.

[조 선]

1394년(태조 3)에 증산을 나누어 따로 현(縣)을 두게 되어 갈려나가고, 강서현은 동부(東部)·사진(沙津)·보원(普院)·부암(浮巖)·초성(草城)·학림(鶴林)·거암(擧巖)·영천(永川)·한룡(閑龍)·용연(龍淵)·서부(西部)의 11방(坊)을 거느리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몽진 도중 이 곳에서 2개월 동안 머무른 일이 있었으며, 그 사실이 강서성적비(江西聖蹟碑)에 기록되어 있다.

[근 대]

1895년(고종 32) 행정제도 개편 때 현을 군으로 개칭하고 군수를 두었으며, 각 방에 집강(執綱)을 두었다. 한편, 1906년 방을 면으로 개칭하였다. 이 때 평양부(平壤府)로부터 잉차·초리 두 면이 이속되었고 군내면(郡內面)이 새로 생겨 모두 13개 면으로 증가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증산군을 폐하고 진방면(鎭坊面)·초곡면(草谷面)은 평원군(平原郡)에 이속되고, 나머지는 강서군에 이속되었다. 이 때 강서군은 총 16개 면이 되어 군의 경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29년에는 장안면(長安面)이 함종면에 합병되고 신흥(新興)·풍정(豐井) 두 면이 신정면이 되어 모두 14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대동강을 낀 평야지대로 고구려시대 이래 평양과 관계 깊은 지역이며, 1876년(고종 13) 이후에 일찍이 개화되어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많은 선각자가 나왔고, 양기탁(梁起鐸)·손정도(孫貞道)·조만식(曺晩植) 등 민족지사가 나와 민족자주독립운동에 기여한 바 크다.

유물·유적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동진면 태성리의 고인돌·독무덤 등을 비롯해, 고구려시대의 돌방무덤·벽돌무덤을 포괄하는 복합유적을 들 수 있다. 고구려고분은 사신도로 유명한 강서면 삼묘리대묘(우현리대묘)·중묘·소묘 및 연화문으로 유명한 태성리연화총과 보림면의 간성리연화총 등이 있다.

조선시대 유적으로는 1829년(순조 29)에 건립된 강서성적비가 있고, 수산면 천도리에는 천도천사적비(千渡川事蹟碑)가 있다. 지금의 보산항은 광해군 때 대명해상교통로의 통빙참소(通聘站所)인 보살원(菩薩院)이 있던 장소이다. 광해군 때 만주에 여진족이 흥기해 육상교통로가 차단되었을 때 이 곳에 외빈관(外賓館)이 있었다 한다.

또한 보산항은 조선시대에 평양 외곽수비를 위해 진을 두고 군사를 배치했던 보산진이 있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이 항구에서 무연탄을 대량으로 반출하였다. 강서면의 진산인 무학산에는 신사(神祠)·불우(佛宇)·누대(樓臺)가 많았으나 모두 파괴되었고, 다만 옛 군아의 문루이던 것을 왕등산의 문묘(文廟) 남쪽으로 옮긴 서일루가 볼 만하다.

학동서원(鶴洞書院)은 강서김씨의 시조인 김반(金泮)을 모시는 서원으로 1684년(숙종 10)에 설립되고 2년 뒤에 사액되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강서면에 1516년(중종 11) 강서향교가 건립되었으며, 1590년(선조 23)에는 학동서원이 건립되어 유학교육을 담당하였다.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는 1900년에 설립된 강서공립소학교(德興國民學校의 전신)가 있다.

1834년 동진면 탄포리에 정로교회, 강서면 암저리에 학동감리교회가 설립되는 등 군내 각지에 교회가 설립되면서 교회에서 학교를 세워 국민계몽을 담당하였다. 1935년경에는 다른 군의 사립학교는 2, 3개교 정도로 쇠퇴했으나, 이 군에는 안창호가 설립한 점진학교(漸進學校)를 비롯해 20개교나 있었는데, 그것은 강서군민의 특별한 교육열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군의 유일한 중등학교로 1944년에 지방유지들에 의해 세워진 강서중학교가 있었으며 공립국민학교는 광복 당시 15개교였다. 종교상황을 보면, 성태면을 중심으로 천주교, 성암면을 중심으로 안식교가 활발했고, 천도교도 여러 개의 포교소를 두고 교화에 힘썼다. 이러한 교육과 종교활동을 통해 안창호·양기탁·조만식과 같은 항일투사가 배출되었다.

이 고장에 전하는 설화는 천도천이야기와 인주둑전설이 대표적이다. 천도천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한 선조가 잠시 강서현에 머물렀을 때, 이 고장 사람 김후손이 자기 재산을 모두 기울여 왕은 물론 일행까지 극진히 대접하였다.

이 때 자기집과 왕이 머무르는 관아는 20여 리나 떨어지고 그 사이에 큰 강이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날마다 몇 번씩이고 건너다니면서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는 전설이다. 후에 이 내를 천도천이라 했으며 마을 이름도 천도리라고 하였다.

인주둑설화는 동진면 학송리의 제방에 얽힌 이야기로서 인신공희(人身供犧)의 한 예이다. 이 마을은 홍수 때마다 둑이 터져 큰 피해를 입었다. 어느 때 마을사람들이 둑을 다시 쌓고 있을 때, 지나가던 중이 사람기둥[人柱]을 세운 뒤 쌓으면 둑이 터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그 중을 그 자리에 묻고 공사를 끝냈더니 이후 둑은 다시 터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밖에 증산면 반룡리의 쌀섬[米島]전설이 있다. 수나라 군사가 이 근처의 바닷길을 건너 침공했을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삿자리 수천 장을 이어서 군량미의 노적가리처럼 보이도록 위장해 두었더니 적군이 그것을 군량미로 잘못 알고 방비가 튼튼하다고 생각해 후퇴, 청천강구로 상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교통

대부분 지역이 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명학제(鳴鶴堤)·유구제(遊龜堤) 등 수리시설도 잘되어 있고, 도내 다른 군보다 비교적 논이 많다. 따라서 쌀의 생산도 많은 편이며, 밭작물인 조·밀·수수·대두 등의 산출도 많은 편이다. 가까이 있는 평양·진남포·송림 등이 근대적 공업도시로 발달함에 따라, 이 곳은 근교농업이 급속도로 발달하게 되어 과실·채소의 재배가 성황을 이루었다.

특산물로는 강서참외·함종밤 등이 유명하며 양돈·양계·축우 등을 부업으로 하는 농가가 많다. 이 고장의 강서약수는 위장병에 좋아 유명하다. 지하자원으로는 무연탄·철광·고령토의 매장량이 많아 기양(岐陽)의 경금속공업과 강선(降仙)의 제강공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한편 농산물과 축산물의 거래를 위해 각지에서 정기시장과 가축시장이 운영되어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일과 7일장으로는 강서면 덕흥리의 군내장(郡內場)과 반석면에 서는 사천장(泗川場)이 있다.

1일과 6일장으로는 함종면의 함종장, 3일과 8일장으로는 성암면의 남양장, 쌍룡면의 문동장(文洞場), 신정면의 신흥장(新興場), 4일과 9일장으로는 동진면의 기양장(岐陽場), 증산면의 읍내장, 수산면의 오이리장이 있고, 5일과 10일장으로는 성태면의 마산장(馬山場)이 있다.

여기서는 대개 지방산물과 생활잡화가 거래되고, 평양과 근접해 있는 관계로 큰 거래나 귀중한 물품은 대개 평양에 직접 가서 구입하고 있다. 그 밖에 우시장으로 가장 활발한 거래를 이루는 곳은 기양가축시장이다.

교통은 평양∼남포간의 1등도로가 군의 동남부를, 숙천(肅川)∼남포간의 2등도로가 함종과 증산을 통과하고 있다. 3등도로는 평양∼한천간, 기양∼증산간, 강서∼남포간에 놓여 있다. 철도는 평양∼남포간의 평남선이 군의 남부를 통과하며, 태성·기양·강선의 세 역이 있다.

보림면 관포리에는 보산항(保山港)이 있는데, 옛날에는 수운이나 국방의 요충지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갑오경장 이후로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인근지역은 자연경관이 빼어나 ‘강서팔경’으로 알려져 있다.

읍·면

[강서면 江西面]

군의 남부에 있는 면. 면적 45.69㎢, 인구 1만 2273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덕흥리이다. 1906년에 방(坊)이 면으로 개편될 때 동부면의 3개 이와 서부면의 3개 리가 병합되어 군내면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거암면의 일부가 병합되어 강서면으로 되었다.

면의 진산으로 무학산이 있다. 수교천의 서북쪽에는 화표봉(華表峰)이 있는데, 봉우리의 모습을 본떠 화산(花山)이라 불러오다가 현령으로 왔던 조근(趙根)이 토산을 쌓은 뒤부터 화표봉이라 불리게 되었다. 일명 학란구(鶴卵邱)라고도 한다.

또 면 소재지 부근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몽진와 있으면서 올라갔던 왕등산이 있다. 거장리에는 정림산이 있는데, 그 동쪽으로 사봉(沙峰), 서쪽으로 거암(擧巖), 남쪽으로 대간(大幹), 북쪽으로 봉수대가 있으며, 산의 아래쪽으로는 이름난 무덤과 마을이 있다.

삼묘리에는 도전산(都典山), 현봉리에는 죽적산(竹笛山)이 있다. 수교천이 면의 중앙을 지나면서 수리에 이용됨으로써 쌀이 많이 생산된다. 이 밖에도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되고, 특산물로는 왕골·사과 등이 있다. 남부탄전지대에 속하는 일부지역에서는 1917년 무연탄광이 개발되었으며, 질이 좋은 고령토도 산출된다.

교통은 북으로 영유, 서남으로 용강, 서북으로 함종·증산, 대동강을 건너 중화 등지로 통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교육은 1906년 이우영(李宇榮)이 군수로 부임하면서 문천의숙(聞天義塾)을 설립해 초등교사의 양성을 목적으로 수학·물리·영어 등을 직접 가르쳤고, 한문·체조 등은 유명인사를 초빙하여 가르침으로써 많은 인재와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그 밖에 암저리에 봉암학교, 덕흥리에 청년학교, 정화리에 의성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정화리에는 위장병 등의 질환에 약효가 있다는 약수터가 있어 연중 환자와 휴양객이 모여든다. 면의 남쪽에는 고관들과 시인묵객들이 화방주를 띄우고 놀던 명학지의 옛터가 있다.

삼묘리에는 대·중·소 3개의 능묘가 있는데 1971년 북한소재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왕등산 문묘의 남쪽에 서일루가 있다. 덕흥(德興)·정화(靜和)·거장(巨庄)·암저(巖底)·현봉(賢鳳)·삼묘(三墓)·광향(廣鄕)·학천(鶴泉)·염전(塩廛) 등 9개 리가 있다.

[동진면 東津面]

군의 동남부의 중앙에 있는 면. 면적 51.72㎢, 인구 1만 6168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기양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진면과 동부면, 그리고 거암면의 다전리(多田里)·필모리(必毛里)·명학리(鳴鶴里)·추매리(楸梅里)를 병합해 동진면이 되었다.

태성리에는 직왕산(稷王山) 및 용강군과 경계를 이룬 석천산(石泉山)이 있으며, 용정리에 주마산(走馬山), 학송리에 황산(黃山), 기양리에 기산(岐山), 심정리에 중학산(中鶴山), 덕봉리에 덕봉산(德鳳山)이 있다.

하천은 강서면의 정림산에서 발원한 광탄천이 대동강 하류로 흘러든다. 농산물로는 쌀 생산이 가장 많고, 이 밖에 잡곡류와 면화·고추·깨 등도 생산된다. 특히 면화는 품질이 양호해 평안남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농가에서는 대부분 양잠으로 농가소득을 올렸으며 농우사육·양돈·양계 등도 소득증대에 이바지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양질의 고령토가 생산되어 요업이 발전했고, 공업으로는 태평양전쟁 때 기양리에 조선경금속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교통은 평남선 3등도로, 기증선 3등도로, 강진선 3등도로 등이 통과하고, 평양∼진남포간의 철도까지 통과하고 있어서 교통이 매우 편리한 편이다.

교육기관으로는 1899년 안창호가 고일리에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설립해 애국사상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 이와 때를 같이해 추죽리에 황은학교(皇恩學校), 태성리에 명신학교(命信學校) 등이 설립되었으며, 1942년에는 이 곳 출신인 교사 안정자(安正子)와 정기수(鄭基琇)가 기양리에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기양(岐陽)·탄포(灘浦)·고일(古逸)·추죽(推竹)·신교(新橋)·덕봉(德鳳)·태성(台城)·다필(多必)·어은(於隱)·심정(心貞)·학송(鶴松)·청산(靑山)·용정(龍井)·석현(石峴) 등 14개 리가 있다.

[반석면 班石面]

군의 동부에 있는 면. 면적 39.97㎢, 인구 6,23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사리이다. 본래 평양부의 반석방(班石坊)이었으며, 1906년 증산군에 이속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서군에 편입되었다. 반이리에는 모산(帽山)·고산(孤山)·장산(長山) 등이 있고, 하사리에는 봉래산(蓬萊山)이 있다.

농산물로는 쌀 생산이 주종을 이루고, 이 밖에 잡곡류와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농가에서는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으로 소득을 올린다. 또 일부지역이 남부탄전지대에 속해 질이 좋은 무연탄이 생산되고 있다.

교통은 강서에서 성태면을 통과한 평한선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면의 서쪽 변두리지역을 통과한다. 교육기관으로는 반이리에 삼덕학교(三德學校), 반육리에 반석학교(盤石學校), 상사리에 양덕학교(養德學校) 등이 각각 설립되어, 안창호가 설립한 점진학교의 교육체제를 본받아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상사(上四)·하사(下四)·반삼(班三)·반일(班一)·반오(班五)·반이(班二)·반육(班六) 등 7개 리가 있다.

[보림면 普林面]

군의 동남단에 있는 면. 면적 50.89㎢, 인구 8,891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화학리이다. 원래 보원면과 학림면의 2개 면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병합되어 보림면으로 되었다.

관포리의 보산진(保山鎭)에는 조선시대 중엽까지만 해도 성 안에 수백명의 수비병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갑오경장 이후 폐지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무연탄의 반출항구로 이용되었다. 한편 명나라의 사절이 쉬고 갔던 보살원의 터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간성리에는 고구려 벽화고분인 연화총(蓮華塚)이 있다. 서학리에 있는 서학산은 일명 구룡산이라고도 하며, 산세가 웅대하고 경관이 뛰어나 ‘강서의 금강’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월아산(月峨山)과 현동산(玄洞山)이 있다.

하천으로는 대동강이 면의 동쪽 경계선을 따라 흐르고 있으며, 수교천이 무학산에서 발원한 광탄천과 합류해 보산항으로 유입한다. 농산물로는 쌀이 많이 생산되며, 이 밖에 잡곡류와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농가에서는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대동강변의 반어촌에서는 봄·가을로 농어·숭어·뱅어·모래무지와 어패류 등으로 소득을 올린다. 광업으로는 철광이 있다.

교통은 평남선 1등도로와 철도선이 서북쪽의 변두리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서학리에 사립 육영학교(育英學校)가 있다. 화학(和鶴)·서학(棲鶴)·관포(觀浦)·문천(聞天)·남삼(南三)·학남(鶴南)·유현(柳峴)·우산(羽山)·대화(大和)·간성(肝城)·광포(廣浦) 등 11개 리가 있다.

[성암면 城巖面]

군의 남단에 있는 면. 면적 43.85㎢, 인구 1만 242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남양리이다. 초성면과 정암면(淨巖面)의 2개 면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성암면으로 되었다.

대안리에 원당산(院堂山), 세죽리에 발이산(鉢伊山)이 솟아 있고, 동쪽의 변두리지역으로 대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용강군의 화성산(華城山)·마두산(馬頭山)·석천산(石泉山) 등지에서 발원한 물이 입송리에 와서 인황천(仁皇川)이 되어 주산리·죽마리·영평리를 지나 대동강 하류로 유입한다.

농산물로는 쌀이 많이 생산되고, 이밖에 잡곡류와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되고 있다. 농가에서는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으로 농가소득을 올린다. 대동강변의 반어촌에서는 봄·가을로 농어·숭어·뱅어·모래무지와 조개류 등을 잡아 소득을 올린다.

공업으로는 태평양전쟁 당시 제강공업이 이루어졌다. 교통은 용중선 3등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남양(南陽)·금산(金山)·대안(大安)·대정(大井)·차제(車堤)·영평(永平)·세죽(細竹)·죽마(竹馬)·주산(舟山)·입송(立松) 등 10개 리가 있다.

[성태면 星台面]

군의 북동부에 있는 면. 면적 86.43㎢, 인구 1만 31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당리이다. 평양부에 속해 있다가 1906년 금려대면(金呂垈面)의 일부를 병합하여 증산군에 이속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강서군에 편입되었다.

태사리에 성태산(星台山), 원당리에 원당산(元塘山)·기우산(祈雨山), 가장리에 체산(體山) 등이 있다. 농산물로는 쌀 생산이 주종을 이루고, 이 밖에 잡곡류와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농가에서는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평한선 3등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대마리에 사립 희명학교(熙明學校)가 설립되어 항일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신문화교육을 실시하였다. 원당(元塘)·태일(台一)·태사(台四)·성일(星一)·성이(星二)·성삼(星三)·성사(星四)·성오(星五)·성육(星六)·성칠(星七)·연곡(硯谷)·가장(可庄)·대마(大馬)·금송(金宋) 등 14개 리가 있다.

[수산면 水山面]

군의 서남부에 있는 면. 면적 58.46㎢, 인구 6,83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이리이다. 오산면(吾山面)과 수천면(水川面)의 2개 면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수산면이 되었다. 이때 거암면의 생리(生里)와 가옹동(可雍洞) 및 가현동(可峴洞)이 이 곳으로 편입되었다.

천도리에는 지명 유래와 관련된 천도천이 있다. 가현리에 쌍아산(雙牙山, 일명 元通山), 어경리에 유정산(踰淨山), 운북리에 운룡산, 백운리에 응암산 등이 있다. 면의 동북쪽에 명학제라는 저수지가 있어 쌀이 많이 생산된다. 이 밖에 잡곡류와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되며, 농가에서는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으로 농가소득을 올린다.

지하자원으로는 양질의 고령토가 산출되며, 교통은 강비선 3등도로가 통과한다. 교육기관으로는 가현리에 영신학교(永信學校), 운북리에 진명학교(眞明學校)가 설립되어 인재를 배출하였다. 오이(烏耳)·금천(金泉)·가생(可生)·가현(可峴)·신정(薪井)·가흥(佳興)·백운(白雲)·운북(雲北)·천도(千渡)·어경(於京)·고학(古鶴)·쌍송(雙松)·운남(雲南) 등 13개 리가 있다.

[신정면 新井面]

군의 서쪽 해안 중앙에 있는 면. 면적 60.25㎢, 인구 1만 1187명(1944년 현재). 면소재지는 구련리이다. 원래 증산군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증산군이 강서군으로 이속되면서 소정면(小井面)과 대정면(大井面)이 병합되어 풍정면(豐井面)이 되었고, 북리면(北里面)과 오관면(吾串面)이 병합되어 신흥면(新興面)이 되었는데, 1929년 이 신흥면의 발산리(鉢山里)를 제외한 지역과 풍정면이 병합되어 신정면으로 되었다.

산으로는 발산(鉢山)·화산(花山)·차유산(車踰山) 등이 있고, 하천은 응암산에서 발원한 삼경천(三坰川)이 면을 관류해 황해로 유입하고, 국수봉에서 발원한 국령천(國靈川)이 강서 농장저수지로 유입한다.

농산물로는 쌀이 많이 생산되며, 잡곡류도 생산된다. 그 밖에 면화·고추·깨 등이 많이 생산되며, 농가에서는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서해안의 어촌지역에서는 조기·오징어·태도어·모래무지·새우와 조개류 등으로 소득을 올리며, 담수어를 저수지에 방류하여 양어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 밖에 일부지역에서 제염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교통은 진남포∼영유간의 2등도로가 면 중앙을 지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구련리에 사립 사달학교(四達學校)가 설립되어 신문화운동에 앞장섰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공립에 흡수되었다. 구련(龜蓮)·후현(後縣)·신(新)·진사(進士)·탄현(炭峴)·이(二)·삼(三)·사(四)·연하(烟霞)·하청(河淸)·대흥(大興)·화산(花山) 등 12개 리가 있다.

[쌍룡면 雙龍面]

군의 중앙에 있는 면. 면적 45,57㎢, 인구 8,65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다족리이다. 용연면과 한룡면이 병합되어 쌍룡면이 되었다. 봉오리에 도태산(都胎山), 다족리에 월출봉(月出峰), 임성리에 치산(鴟山) 등이 있고, 유명리에는 철산(鐵山)과 약방산(藥房山)이 있다. 약방산에는 신선이 약을 캐서 동쪽의 자약동(煮藥洞)으로 가서 약을 달여먹었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이 주로 생산되고, 이밖에 잡곡류와 목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농가에서는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으로 소득을 올린다. 그 밖에 양질의 고령토가 생산되어 도기 등의 요업이 발전했으며, 유명리에 철광이 있어, 중일전쟁을 비롯해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이를 개발해 철광석을 반출하여갔다.

교통은 철광석을 반출하기 위해 부설된 철도와 기증선 3등도로가 관통하고 있으며, 다족리에서 갈라져 증산으로 가는 도로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1932년 1면1교제가 실시됨으로써 비로소 국민학교가 설립되었다. 다족(多足)·기(基)·유명(柳明)·창포(菖蒲)·임성(林城)·봉오(鳳梧)·신경(新慶)·산경(山慶)·운포(雲浦) 등 9개 리가 있다.

[잉차면 芿次面]

군의 동남단에 있는 면. 면적 32.23㎢, 인구 7,60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리이다. 원래 평양부에 속해 있었는데, 1906년 방이 면으로 바뀔 때 강서군으로 편입되었다. 북쪽에는 현암산(玄巖山)이 대동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 밖에 조양리에 봉명산(鳳鳴山), 토산리에 빈마산(牝馬山), 오리에 천진산(天津山) 등이 있다.

면의 동남쪽으로는 대동강이 대동군과 경계를 이루며 흐르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이 많이 생산되고, 이 밖에 잡곡류와 면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특히 면화는 품질이 우수해 도내에서 손꼽히며, 면포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농가에서는 대부분 양잠에 힘쓰고, 그 밖에도 농우사육과 양돈·양계를 겸해 소득을 올린다.

대동강변의 어촌에서는 봄·가을로 농어·숭어·뱅어·모래무지와 조개류 등으로 소득을 올렸다. 교통은 평남선 및 1등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삼리에 보명학교(步明學校)가 설립되어 신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오(五)·일(一)·이(二)·삼(三)·팔(八)·화석(花石)·조양(朝陽)·토산(兎山) 등 8개 리가 있다.

[적송면 赤松面]

군의 북부 최남단에 있는 면. 면적 64.49㎢, 인구 6,74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석삼리이다. 원래 평양부의 적석면(赤石面)과 적연면(赤延面)으로 되어 있었는데, 1906년에 증산군에 이속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증산군이 강서군에 병합되면서 적석면과 적연면이 병합되어 적송면이 되었다.

석삼리에는 석대산(石大山)이 있는데, 이 산의 정기로 인해 산의 인접지역이 장수(長壽)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명장인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바로 이 곳에서 출생하였으며, 석대산 굴속에서 병서를 정통했다고 한다. 또 을지문덕은 석이리의 마이산(馬耳山)에서 궁술과 검술을 익혔다고도 한다.

석대산과 접해 있는 살구재[杏嶺]의 고갯마루에는 살구밭이 있는데, 을지문덕이 군졸을 이끌고 고개를 넘을 때 목마른 군졸들의 해갈을 살구로 풀게 했다는 옛이야기가 전한다.

농산물로는 쌀 및 잡곡류와 목화·고추·깨 등이 생산되며,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으로 소득을 올린다. 해변의 어촌지역에서는 일제의 수탈정책에 의해 어로법이 개선되면서 조기·농어·숭어·뱅어·오징어·태도어·모래무지와 조개류 등으로 어획고를 올렸으나, 고급생선은 전부 산 채로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나머지는 염장이나 건어로서 반출되었다.

이 밖에 조개류의 양식업도 시도되었으며, 저수지에서는 잉어·공미리 등의 담수어를 방류해 양어에도 힘썼다. 교통편으로는 진남포∼영유간의 2등도로가 면의 중앙을 지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석삼리에 국민학교가 있다. 석삼(石三)·석일(石一)·석이(石二)·석사(石四)·석오(石五)·석육(石六)·석칠(石七)·청령(淸嶺)·삼부(三府)·곡신(殼新) 등 10개 리가 있다.

[증산면 甑山面]

군의 북부 해변 중앙에 있는 면. 면적 81.65㎢, 인구 1만 292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취룡리이다. 원래 증산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증산군이 강서군으로 이속되면서 황천면(黃泉面)·사현면(師賢面)·성도면(聖陶面)·국보면(國寶面) 등 4개 면이 병합되어 증산면으로 되었다.

서쪽에는 고석산(古石山)과 비호산(飛虎山)이 있는데, 고석산의 정상에는 김씨의 시조를 모신 명당이 있으며, 여기에 묘를 쓰고부터 장수가 태어났다고 한다. 고적산 앞의 비호산에는 호랑이가 많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증산·국령산·옥녀봉 등이 있다.

농산물로는 쌀이 많이 생산되고, 이 밖에 잡곡류와 목화·고추·깨 등이 생산된다.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도 농가소득에 기여한다. 해변어촌에서는 조기·농어·숭어·뱅어·태도어·모래무지와 조개류 등의 어로사업으로 소득을 올린다.

교통은 진남포∼영유간의 2등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이안리에 사립 창신학교(彰新學校)가 설립되어, 항일애국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신문화운동을 전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공립에 흡수되었다.

취룡(聚龍)·영천(靈泉)·화선(化善)·정양(正養)·사과(四科)·무본(務本)·승영(升楹)·두만(斗滿)·정실(鼎實)·저명(杵鳴)·가풍(歌豐)·낙생(樂生)·오흥(吳興)·미회(美會)·반룡(蟠龍)·자봉(紫鳳)·용덕(龍德)·광제(廣濟)·부암(釜巖)·오화(五和)·이안(利安) 등 21개 리가 있다.

[초리면 草里面]

군의 동남단 대동강변에 있는 면. 면적 23.93㎢, 인구 1만 158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강선리이다. 평양부에 속해 있다가 1906년 강서군으로 편입되었다. 보봉리에 홍산(鴻山)이 있으며, 면 동쪽의 변두리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이 많이 생산되고, 이 밖에 잡곡류와 질이 좋은 목화, 그리고 고추·깨 등도 생산된다.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대동강변의 반어촌지역에서는 봄 가을로 농어·숭어·뱅어·모래무지와 조개류 등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일제의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강선리에서 제강공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철도교통은 평남선이 면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보봉리에 봉룡학교(鳳龍學校), 송호리에 보신학교(普信學校), 이로리에 보명학교(普明學校)가 설립되어 항일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강선(降仙)·포(浦)·송호(松湖)·남호(南湖)·이로(伊老)·보봉(寶鳳)·사(沙) 등 7개 이가 있다.

[함종면 咸從面]

군의 서남단의 해안에 있는 면. 면적 22.84㎢, 인구 1만 183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함종리이다. 본래 함종부였으나 1906년 증산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서군에 편입되면서 중리면(中里面)과 남리면(南里面)을 병합해 함종면이 되었고, 1929년에는 장안면(長安面)과 신흥면(新興面)의 발산리가 편입되었다.

서해안에는 봉황두산이 있으며, 그 아래로 호두산과 쌍어산이 절경을 이루어 서해안의 명승지로 꼽히고 있다. 이 밖에도 아선산(牙善山)·소고지산(所高指山)·부산(釜山)·검산(檢山)·석고개산(石古介山)·가마산(加馬山)·물백채산(勿白菜山) 등이 면을 둘러싸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이 많이 생산되며, 잡곡류와 목화·고추·깨 등도 생산된다. 특히 밤이 많이 나는데 껍질이 잘 벗겨지고 맛이 감미로운 것이 특징이다. 농가에서는 누에치기·농우사육·양돈·양계 등으로 소득을 올렸고, 어촌에서는 조기·오징어·태도어·모래무지·새우와 조개류 등의 어업과 제염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교통은 진남포∼영유간의 2등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고려 말의 홍의적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무명용사 소소래(蘇素來)의 사당인 소당(蘇堂)이 응암산 밑에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안석리에 사립 희명학교(熙明學校)가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공립에 흡수되었다.

함종(咸從)·홍범(洪範)·석교(石橋)·송경(松坰)·미석(美石)·계양(桂陽)·계산(鷄山)·안석(安石)·봉황(鳳凰)·달상(達上)·일중(一中)·고경(古京)·여오개(汝吾介)·범오(範五)·발산(鉢山) 등 15개 리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증산면·쌍룡면·성태면·함종면·적송면·신정면은 증산군을 신설하면서 이관하고, 나머지 지역으로 개편하였다. 1956년 9월 기양노동자구와 상처리를 병합, 강서읍에 편입했고, 강서읍을 덕흥리로 개칭하였다.

1967년 10월 보봉리·강선리·고창리 등의 일부를 분리해 강선노동자구에, 보재리를 태성리에, 송호리와 강선리를 보봉리에, 서기리를 함률리에, 삼묘리 일부와 학전리를 덕흥리에, 거압리를 약수리에, 태평리를 고창리에, 학송리를 삼묘리에, 운룡리를 수산리에 편입하고, 보림·송호·강선·학천·거압·태평·학송·운학 등 8개 리를 폐지하고, 22개 리·노동자구로 개편하였다.

인구는 30여 만 명이다. 1978년 3월 대안시(大安市)가 신설되면서 강서군은 이에 흡수, 폐지되었고, 1979년 남포시가 직할시로 개칭((2010년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옛 강서군 지역은 강서구역으로 되었다. → 남포직할시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택리지』
『한국민간전설집』(최상수, 통문관, 1958)
『강서군지』(강서군지편수회, 1967)
『평안남도지』(평남도민회, 1977)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북한교육기관 및 문화재현황』(국토통일원, 1983)
『북한행정구역 및 산천지세』(국토통일원, 1983)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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