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장단군, 서 · 남 · 북쪽은 개풍군과 접하고 있다. 고려의 옛 도읍지로 문화유적이 많은 역사도시이며,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78㎞ 떨어져 있다. 동경 126°31′∼126°35′, 북위 37°57′∼38°에 위치하며, 동서 길이 8.3㎞, 남북 길이 6.8㎞, 면적 약 82㎢, 인구 7만 2000명(1940년 현재)이다.
수창(壽昌) · 동흥(東興) · 서흥(西興) · 남안(南安) · 북안(北安) · 선죽(善竹) · 자남(子男) · 용산(龍山) · 관훈(冠訓) · 동현(銅峴) · 손하(孫河) · 고려(高麗) · 만월(滿月) · 태평(太平) · 사직(社稷) · 운학(雲鶴) · 덕암(德巖) 등의 17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수창동이다.
마식령산맥의 말단부가 북에서 남으로 뻗어내려 있고, 남쪽 일부는 한강과 예성강의 하류지역으로 좁은 분지를 이룬다. 북쪽에 천마산(天摩山), 그 남쪽에 시의 진산인 송악산(松岳山, 488m)이 있고, 그 밖에 동남쪽에 용수산(龍岫山, 178m), 서남쪽에 진봉산(進鳳山, 310m)이 있으며, 남쪽에 한강이 흘러 평야가 이루어져 마치 부산대수(負山帶水)의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산세가 아름다우므로 고려의 옛 도읍인 송도(松都)가 자리한 것 같다. 연평균기온 10.4℃, 1월 평균기온 -6.2℃, 8월 평균기온 25.3℃ 내외로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기후이나, 같은 위도상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온화한 편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253㎜이며, 서리는 대개 10월 초순부터 내리기 시작해 이듬해 4월 하순에 끝난다.
[고 대]
구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아직까지 발굴된 바가 없고, 오송산(蜈松山) · 용출라성(龍出羅城) · 개성(開城) 부근에서 석기류 · 돌도끼 등의 신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 대방의 옛터였던 개성은 고구려 때 부소갑(扶蘇岬)으로 불렸으며, 신라 때는 송악군(松岳郡)으로 개칭되었다. 475년 백제의 세력이 죽령 · 조령 · 아산만의 서남쪽으로 후퇴하기 전 100여 년 동안 백제의 세력권에 있었으며, 555년(진흥왕 16)부터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694년(효소왕 3)에는 송악에 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보이므로, 그 이전에 송악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898년(효공왕 2), 즉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할 때는 궁예(弓裔)가 도읍으로 삼기도 하였다.
[고 려]
919년(태조 2) 고려 태조가 송악 남방지역에 도읍을 정한 다음 개성군(현재 개풍군)을 합병해 개주(開州)라고 했으며, 935년 신라를 복속한 후 국도(國都)가 되었다. 960년(광종 11)에 개경(開京)으로 개칭되었으며, 995년(성종 14) 개성부(開城府)로 되었다.
이 개성부는 송악군과 개성군을 통합한 명칭으로, 1945년 이전의 개풍군 서면 개성리와 구별된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침입으로 궁궐과 민가가 회진되는 참변을 겪은 후 1018년 개성부를 혁파, 현령으로 대치했고, 정주(貞州) · 덕수(德水) · 강음(江陰)의 세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토성으로 축조된 나성(羅城)은 강감찬(姜邯贊)의 요청에 의해 이가도(李可道)가 역사를 시작해 1029년에 완성했으며, 5부 35방 344리로 구획되었다. 1062년(문종 16) 개성부사로 부활시켜 개성현령 소관이던 정주 · 덕수 등 11현을 예속시켰고, 황해도에 있던 우봉군(牛峯郡)을 이속시켰다.
1232년(고종 19) 최우(崔瑀)가 왕을 위협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공도(空都)가 되기도 하였다. 1308년(충렬왕 34) 개성부로 승격, 부윤 이하 행정관을 배치해 도성내를 관장하게 하는 한편, 개성현령을 두어 도성외를 관리하게 하였다. 1390년(공양왕 2)경기지역을 좌우 양도로 분할할 때 개성현은 우도에 편입되었다.
[조 선]
조선왕조가 창업된 뒤 태조 · 정종 · 태종대에 국도가 되었으나,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인 1405년(태종 5)에는 개성의 관제를 크게 고쳐서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를 설치하고, 유후(留後) · 부유후(副留後) · 경력(經歷) · 도사(都事) 각 1인씩을 두었다.
1438년(세종 20) 개성부로 고치고 유수를 두었으며, 1467년(세조 13)경기에 예속되어 부윤 · 판관이 배치되었다. 1573년(선조 6) 숭양서원(崧陽書院)이 창건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이 의주로 몽진할 때는 2일 동안 이 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1711년(숙종 37) 관리영(管理營)으로 개칭되어 유수가 관리사를 겸했고, 1727년(영조 3) 왕씨의 자손을 등용하게 됨에 따라 유수 조영복(趙榮福)의 천거로 왕우(王瑀)가 동부참봉(東部參奉)에 임명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鱗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수 심홍(沈珙)이 기병 300인을 이끌고 토평에 참여해 무사 300인이 원종공신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도 개성의 기병이 순무군(巡撫軍) 예하에 동원되어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근 대]
1896년에는 관찰부로 개칭되어 장단 · 풍덕 · 이천 · 안형 · 토산 · 곡산 · 삭령 · 마전 · 신계 · 수안 · 평산 · 금천 등 12군을 관할하다가 1897년 관찰부가 폐지되어 환원되었고, 다시 개성부윤이 배치되었다.
1906년 부윤을 폐지하고 개성군수를 임명, 동 · 서 · 남 · 북 4부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4부면이 병합, 송도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30년 부제의 실시에 따라 개성부로 개칭되었고, 부외의 땅은 개풍군으로 삼았다. 1938년개풍군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현 대]
광복 후 남한에 속했고, 1949년 시제(市制)의 실시에 따라 개성시가 되었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인해 북한지역이 되었다.
신석기시대 유물로는 개성의 나성 주변에서 빗살무늬토기 등이 수습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성곽 · 분묘 · 사찰 등 각종 유물 · 유적이 풍부해진다. 성곽지로는 1011년에 시작해 19년에 걸쳐 완성한 개성의 나성과 1391년 최영(崔瑩)의 건의로 축조하기 시작한 나성 내부의 반월성(半月城), 고려태조의 아버지인 왕륭(王隆)이 쌓은 발어참성지(拔禦塹城址), 고려 때의 피난성으로 전해오는 대흥산성(大興山城) 등이 있다.
특히 반월성의 남대문은 1393년에 창건되었고, 1955년에 복구한 것으로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남대문의 문루에는 한국 5대 명종의 하나이며, 역시 보물급 유물인 연복사종(演福寺鐘)이 걸려 있다.
사찰로는 관음사(觀音寺) · 대흥사(大興寺) · 운흥사(雲興寺) · 개성사(開城寺) 및 영통사지(靈通寺址) · 흥국사지(興國寺址) 등이 있다. 불일사오층탑(佛日寺五層塔)과 영통사의 오층탑 및 서삼층탑이 국보급 문화재이며, 흥국사탑 · 개국사석등 · 화엄사사리탑과 영통사의 대각국사비 및 동삼층탑 · 당간지주 등이 보물급 문화재이다.
궁궐 및 기타 유적으로는 송악산 남쪽 기슭의 고려왕조의 궁궐터인 만월대, 고려조의 별궁이자 조선태조가 즉위식을 가졌던 수창궁지(壽昌宮址), 그의 집터에 세워진 목청전(穆淸殿), 그의 잠저였던 추동(楸洞 : 개성 중부 남계방)에 세워진 경덕궁(敬德宮), 원나라의 세조쿠빌라이(忽必烈)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세웠던 정동성(征東省)이 있던 곳을 명나라의 사신 숙소로 바꾼 태평관지(太平館址), 고려의 사직단지(社稷壇址) · 성균관,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선죽교(善竹橋), 고려유신 조의생(曺義生) · 임선미(林先味) 등 72인의 절의를 기리는 만수산 남동의 두문동비각(杜門洞碑閣), 고려시대 천문관측을 위한 석대인 첨성대(瞻星臺), 한량들이 활을 쏘던 관덕정(觀德亭), 정몽주 · 서경덕(徐敬德) 등을 배향한 숭양서원 등이 있다.
그 밖에 만가대(萬家垈) · 취적교(吹笛橋) · 서교정(西交亭) · 서사정지(逝斯亭址) · 오서문(午西門) 등의 유적과 박연폭포를 비롯한 자하동 · 쌍폭동 · 채하동 · 부산동 등의 경승지가 있다.
옛 교육기관으로는 선죽교 북쪽 1㎞ 지점에 성균관이 있다. 992년(성종 11) 국자동에 국자감(國子監)을 창건, 유학교육의 효시를 이루면서, 충렬왕 때 국학으로 고친 후 성균관으로 일컫게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규모를 확대해 당시의 유학자 이색(李穡) · 정몽주를 교관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유수 김육(金堉)이 중건하였다.
고려시대 사립학교로는 현종 때 최충(崔沖)이 세운 자하동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이 있었다. 1573년 유수 남응운(南應雲)이 세운 숭양서원은 정몽주의 집이 있던 개성 남자산(男子山) 동남기슭에 있었는데, 우현보(禹玄寶) · 서경덕 · 김상헌(金尙憲) · 김육 · 조익(趙翼)을 배향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6년 미국인 선교사 왓슨(Wasson, 왕영덕)과 감리교 감독 캔들러(Candler)의 주선으로 윤치호(尹致昊)가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 Anglo · Korean School)이 있었는데, 1917년에는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고, 1950년에는 재단법인 송도학원(松都學園)으로 확충하고 송도중학교와 송도약학대학 설립인가를 받아 학생 40명까지 합격자를 냈으나 6·25사변 때 피난해 1953년 인천에서 송도중 · 고등학교를 재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성교육기관은 1904년 미국 남감리교회 여선교사 캐롤(Carrol,A., 갈월)이 세워 개성여학교라 칭한 학교가 그 효시이다. 이후 교명이 여러 번 개칭되었는데 사립호수돈여숙 ·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 호수돈고등여학교, 광복 후인 1946년에는 개성명덕여자중학교로 바뀌었고, 1950년에는 명덕여자중학교와 명덕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6·25사변으로 피난 온 이 학교는 1953년 대전에서 개교하고, 호수돈여자중 · 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민족사학으로 1908년 김정혜(金貞蕙)가 설립한 정화여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여자도 무지에서 벗어나야 이 나라 어머니로서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며,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세운 학교로서, 1918년에는 정화여자보통학교, 1948년에는 개성여자실업중학교(6년제)로 승격되었다. 6·25사변 후 서울에 피난 와 1951년 7월 개교한 이래 정화여자중학교와 정화여자상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밖에 개성사범학교(지금의 인천교육대학의 전신) · 개성약초연구소(지금의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전신) 등이 있다.
이 고장에 전해오는 설화로는 성골장군(聖骨將軍)이야기, 강충(康忠)의 옛 집터이야기, 오줌누는 꿈 이야기, 돈개(일명 錢浦)의 전설, 광명사 용우물전설, 몽부인이야기 등이 있는데, 이들 전설은 모두 고려태조의 건국신화의 전사(前史)로서 왕이 되는 인물은 예사롭지 않으며, 그 조상들이 산신령 · 신선 · 용왕 등과 먼 옛날부터 인연을 맺어온 끝에 때가 되어 왕이 태어난다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이야기들이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어린이들의 〈소꿉노래〉 · 〈아리랑〉(개성지방에서만 부르는 변형된 아리랑타령. 약간의 애교 있는 음담이 섞여 있음.)〈종달새야〉 · 〈신랑꼭지〉 · 〈고도롱뽕〉 · 〈비단짜는 구경 가자〉 등이 있다.
민속놀이로는 ‘명(命)도둑’과 ‘극락길맞이’가 대표적인데, ‘명도둑’은 섣달그믐밤에 아이들이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액막이로 집 안을 밤새 밝히기 위해 켜놓은 촛불을 훔쳐가는 일로, 길거리에서 주인이나 어른들에게 들키어 야단도 맞고 다시 빼앗기기도 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지만, 욕을 많이 먹거나 야단을 많이 맞으면 그만큼 명이 길어지고, 그 해에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주술적 신앙 때문에 기를 쓰고 한다.
‘극락길맞이’는 봄이 지날 무렵 개성주민들이 천마산에 있는 옛 성터인 북성터[北城址]를 한 번만이라도 넘으면 이승에서 지은 죄가 모두 속죄되어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신앙에 근거한 놀이로, 산세가 매우 험한데도 이를 넘어갔다가 온다.
가족 중의 누군가 넘어갔다가 오는 사람이 있는 가정에서는 미리 음식을 장만해 길 도중까지 마중을 나간다. 대개는 박연폭포나 괴정(槐亭)변에서 만나게 되어 그 곳에서 음식을 먹는다. 이 극락길맞이의 목적은 과거의 죄과를 속죄해 극락으로 갈 길을 닦고 돌아온 가족의 노고를 위로하고 축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총 경지면적 138.1㏊로, 논이 30.5㏊(총경지면적의 22%), 밭이 107.6㏊(총경지면적의 78%)이다. 농가구수는 3,319가구이다(1945년 현재). 기후조건이 좋고 토양이 비옥, 농산물 재배에 적합한 지역으로, 쌀 · 보리의 주곡 외에 콩 · 수수 등의 잡곡이 생산되며 배추 · 사과 · 참외 · 감 · 복숭아 등의 생산이 많다.
가축으로는 돼지의 사육이 많으며, 특히 토질이 인삼재배에 적합해 고려인삼의 생산지로 국내는 물론 외국에도 잘 알려져 1945년까지 전국 인삼재배면적의 약 58%를 차지하였다. 특산물로서, 개성배추는 맛이 좋아 국내는 물론 일본으로까지 수출되었고, 송고직(松高織)은 질기고 물이 빠지지 않는 옷감으로서 중국 및 유럽 등지에까지 수출되었으며, 개성소주도 유명하였다.
상업활동은 국제무역항의 구실을 했던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瀾渡)가 가까이 있어 예로부터 외국사신의 왕래에 의한 공무역과 내 · 외국 상인간의 사무역이 번창해 일찍부터 상업도시로서 발달하였다.
고려 초부터 설치한 개성 시전(市廛)은 국내외의 교역을 도맡아하였고, 서울의 육의전과 맞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을 금지해 일시 타격을 받았으나, 워낙 상재에 능한 개성인은 전국의 행상을 조직, 그 기반을 다져 조선 중기에는 전국 제일의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상권을 전국적으로 확대, 조직화해 송방(松房)을 두고 지방생산품의 수집과 상품매매를 하였다. 특히 포목 · 피혁 · 지물 등의 상권을 독점하고 상업자본을 축적, 전국시장의 경제권을 장악하였다.
개성상인의 구성원은 고려왕조의 사대부계층과 많은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 조직적인 상업경영 방식을 발달시켰고, 서양보다 2백 년 앞서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置簿法)이라는 독특한 복식부기와 거래지(去來紙 : 일종의 어음)를 창안, 사용했다.
이 지방은 서울∼평양∼신의주에 이르는 경의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개성 북방 토성에서 해주로 황해선이 분기하고, 도로도 매우 발달해 경향 각지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1951년에 개풍군을 병합해 개성지구라 개칭하고 중앙행정기관의 직속이 되게 했으며, 1955년에는 개풍군 · 장풍군 · 판문군 등을 포함해 직할시가 되었다.
1960년에는 다시 황해남도의 일부와 강원도의 일부지역을 개성시에 편입한 바 있으며, 1967년 10월 태평동 일부를 분리해 역전동을, 고려동 일부와 선죽동 일부를 분리해 부산동을, 용산동 일부와 동현동 일부를 분리해 남산동을 신설했으며, 동흥동 일부는 선죽동에, 관훈동 일부는 동흥동에, 남안동 일부는 동현동에, 만월동 일부와 북안동 일부는 태평동에 편입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