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시 ()

인문지리
지명
한반도 중부 서해안에 있는 시.
이칭
이칭
개경(開京), 송도(松都), 송경(松京), 개성특급시, 개성특별시
지명/행정지명·마을
면적
1,308.634㎢
인구
308,440명(2008년)
행정구역
27동 2리(2010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개성시는 한반도 중부 서해안에 있는 시이다. 본래 경기도 개성부·장단군·개풍군에 속해 있었다. 분단되면서 이북 지역인 개풍군의 일부 면과 장단군의 일부 면이 합쳐져 장풍군이 되었다. 그리고 1949년에 경기도 개성시, 1951년에 개성지구, 1957년에 개성직할시가 되었다. 2003년 황해북도 개성특급시가 되었다가, 2019년 개성특별시로 승격하였다. 2010년 기준 27동 2리를 관할하고 있다. 인구는 2008년 기준 30만 8,440명이다.

정의
한반도 중부 서해안에 있는 시.
개관

북동쪽은 강원도[북한] 철원군, 북쪽은 황해북도 토산군 · 금천군, 서쪽은 예성강을 사이에 두고 황해남도 배천군, 동남쪽은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경기도 연천군 · 파주시와 접해 있다.

자연환경

북부 경계에는 아호비령산맥의 말단부인 천마산맥이 뻗어 있고, 여기에 수용산[716m] · 천마산[762m] · 화장산[558m] 등이 솟아 있다. 지형은 남서부 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시의 서부 및 남부 지역에는 풍덕 · 삼성 · 신광평야 등 넓은 평야들이 펼쳐져 있다. 북쪽 외곽에는 송악산[489m]이 있고, 그 남쪽에는 개성분지가 놓여 있다. 남부 경계에는 한강 · 임진강 · 예성강이 합류하고, 시내에는 임진강의 지류인 사천강과 사미천 등이 흐른다.

기반암은 시생대 · 하부원생대 · 하부고생대 지층과 중생대 관입암인 화강암이며, 금 · 납 · 아연 · 형석 · 석회석 · 고령토 등의 지하자원이 있다. 토양의 대부분은 적갈색 산림토이며, 하천 유역에는 충적토와 염류토가 분포한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 · 습윤하며, 연평균 기온 10.3℃, 1월 평균기온 -5.9℃, 8월 평균기온 24.7℃이다. 첫서리는 10월 중순에, 마감서리는 4월 중순에 내리며, 연평균 강우량은 1,300∼1,400㎜이다. 산림은 군 넓이의 55%이며, 그중 소나무림이 80%를 차지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개성백송[북한 천연기념물 제390호]이 있다. 이 일대는 북방 및 남방계의 동물이 혼생하는 곳으로, 포유류는 30여 종, 조류는 250여 종이 넘는다. 크낙새와 개풍학은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명칭 유래

개성시는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역이었고, 이후 고구려 지배를 거쳐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따라서 행정구역 변천 과정 또한 복잡하고 그에 따른 명칭도 다양하다. 백제 시기 이 지역은 청목산, 청목령으로 불렸다. 개성이 송악산을 의미하는 청목산, 청목령과 같이 산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대로서 군사 작전이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성(城)과 같은 군사 시설이 설치된 지점의 이름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때 지명은 ‘부소갑’과 ‘동비홀’이다. 개성의 지명이 이처럼 두 가지로 불린 것은 삼국시대에 개성이 두 개의 다른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소갑’은 ‘부소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송악산’을 의미한다. ‘동비홀’은 ‘도비구루’, ‘두비구루’를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것이다. 통일신라 시기에 ‘부소압’은 ‘송악산’, ‘동비홀’은 ‘개성군’으로 불렸다.

'개성'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 지리지에 "개성군(開城郡)은 본래 고구려 동비홀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개성부(開城府)이다."라는 기록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동일 문헌의 송악군에서도 "송악군(松岳郡)은 본래 고구려 부소갑이었는데 효소왕 3년(694)에 성을 쌓았으며 경덕왕이 그대로 따랐다. 우리 태조가 개국하면서 왕기(王機)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개성과는 별개로 송악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고려사』 지리지에도 "본래 고구려 부소갑으로 신라가 송악군으로 고쳤다. 태조 2년(919)에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해 개주(開州)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부소갑, 송악, 개주, 동비홀 등의 이칭들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919년에 고려의 수도가 되면서 개성과 송악이 통합되어 개주(開州)가 되었다. 그 후 개경(開京), 황도(皇都), 황성(皇城), 경도(京都)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송도(松都), 송경(松京), 중경(中京), 개성이라고 불렸다. 1396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1405년(태종 5)에 개성유후사를 설치하였다. 1438년(세종 20) 개성부가 되었다. 1896년에 관찰부로 개칭되어 장단 · 풍덕 · 이천 등 12개 군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1897년 관찰부가 폐지되고 개성부윤이 배치되었다.

1906년에는 부윤을 폐지하고 개성군수를 임명하였으며, 동 · 서 · 남 · 북 4부면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14년 4부면이 병합되어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으로 개칭되었고, 개성군 안의 12개 리가 13개 정으로 고쳐졌다. 1930년 부제의 실시에 따라 송도면의 시내 지역은 개성부로 개편되고, 송도면의 나머지 지역과 주변 면들이 풍덕군과 통합되어 개풍군(開豊郡)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 개성부 개풍군, 장단군과 연천군의 일부 지역이 속해 있었다.

1949년에는 남한 관할 경기도 개성시가 되었으나, 한국전쟁 후 북한에 속하였다. 1951년에 개풍군을 병합해 개성지구라 개칭하였으며, 중앙 행정기관 직속이 되었다. 1954년 황해북도에 이관되었다가, 1957년 개성시 · 개풍군 · 판문군이 합쳐져 개성직할시가 되었다. 1960년 황해북도에 속했던 장풍군과 강원도 철원군 일부가 편입되었다.

2002년 판문군을 폐지하고 장풍군 · 개풍군 · 개성시에 분할 편입하였고, 개성공업지구를 지정하였다. 2003년 개풍군과 장풍군이 개성시에서 분리되어 황해북도에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황해북도 관할 특급시가 되었다. 2008년 개풍군이 다시 개성시에 편입되어 개풍동이 되었다. 2019년 나선, 남포에 이어 북한의 세 번째 특별시가 되었다.

현황

광복 후 개성은 현대적인 문화 · 관광도시로 발전하였다. 한옥보존거리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외 여러 형식의 주택과 건물, 통일거리 등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개성은 농업 생산에 유리한 지형 · 기후 · 토양 등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농경지는 시 넓이의 27%를 차지하며, 곡물은 쌀 · 옥수수 · 콩 · 밀 · 보리 등이 생산된다. 그중 쌀은 총 곡물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며, 개풍군 · 판문군에서 70% 이상이 생산된다.

개성은 고려시대 이래 고려자기를 비롯한 수공업과 상업의 중심지이다. 면방직 · 비날론혼방직 등의 직물을 생산하는 개성방직공장을 비롯하여 개성피복공장 · 개성신발공장 · 개성옥쌀공장 · 개성인삼가공공장 · 개성사이다공장 등이 있다.

개성은 중부 지역의 주요 교통 요지이다. 주요 철길인 평부선[21.9㎞]이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통과하고 있다. 여기에는 평부선의 주요 역인 개성역(開城驛), 개풍역(開豊驛), 여현역(礪峴驛)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 운수로는 주로 석탄, 광석, 건재, 비료, 과일, 소금 등이 운반된다. 도로 운수는 개성시 화물 수송량의 81.6%, 여객 수송량의 97.6%를 차지하며, 철도가 부설되지 않은 장풍군과 판문군 지역의 최대 운수 수단이다. 도로망은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 개성∼해주, 개성∼원산, 개성∼판문∼개풍 간 2급도로, 개성∼석둔, 개성∼풍덕 간 3급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한강과 임진강 등에 수상 통로도 개설되어 있는데, 임진강나루, 벽란도 등 여러 개의 나루와 포구가 유명하다.

행정구역은 2010년 현재 고려동, 관훈동, 남문동, 남산1동, 남산2동, 남안동, 내성동, 덕암동, 동현동, 동흥동, 용산동, 용흥동, 만월동, 방직동, 보선동, 부산동, 북안동, 선죽동, 성남동, 송악동, 승전동, 역전동, 운학1동, 운학2동, 은덕동, 자남동, 해운동, 박연리, 삼거리 등 27동 2리를 관할하고 있다. 인구는 2008년 기준 30만 8,440명이다.

유물 · 유적

개성에는 천마산 북쪽에 유명한 박연폭포[북한 명승 제11호]가 있고, 고려 500년 도읍지로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문화유산으로는 고려시대의 유적지인 개성성과 만월대 · 관음사 · 흥국사 · 남대문 · 선죽교 · 성균관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개성성은 시를 둘러싼 고려의 수도성으로서, 919년∼1029년경에 쌓은 평산성(平山城)이다. 외성[둘레 23㎞] · 내성[둘레 11.7㎞] · 황성[둘레 4.7㎞] · 중성[둘레 2.17㎞]이 있다.

만월대는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시대의 왕궁터이다. 남대문은 서울의 숭례문보다 3년 앞선 1394년(태조 3)에 축조된 것으로, 시의 중앙인 북안동에 있다. 문루에는 우리나라 3대 명종(名鐘)의 하나인 연복사 대범종이 있다.

선죽교는 가장 오래된 다리 중의 하나로 시의 동쪽 지남산 기슭에 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암살당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선죽교로부터 500m 지점에 있는 숭양서원(崧陽書院)은 1573년(선조 6) 정몽주의 옛집에 세워진 것으로, 자남산 중턱에 있다. 정몽주의 영정 · 죽장 · 필적 · 옷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성균관은 1089년(선종 6) 문종의 별궁에 국자감을 옮겨와 성균관으로 불리게 되었고, 1602년∼1610년에 개축되었다. 관음사(觀音寺)는 산성리 천마산 기슭에 있으며, 970년(광종 21)에 세워져 1646년(인조 24)에 개축되었다.

흥국사 석탑강감찬(姜邯贊)이 나라의 안녕을 위하여 1021년(현종 12)에 세운 것으로, 현재 자남동에 있다. 개풍군 해선리에는 공민왕릉(恭愍王陵)이 있으며, 고려 태조의 무덤인 현릉(玄陵)이 있다. 또한 공민왕릉 정자각터 옆에는 관통보제선사비가 있다. 송악동 만월대 서문 밖에는 화강암으로 축조된 높이 2.8m의 첨성대가 있다.

장풍군 월고리에는 현화사 당간지주 · 현화사 칠층탑 · 현화사비가 있다. 현화사비는 1021년 세워진 것으로, 높이 4m의 비문에 현화사의 내력이 총 2,400여 자의 글로 새겨져 있다. 그 밖에 판문군에는 3개의 토성과 고려 정종의 능을 비롯한 9개의 왕릉이 있으며, 산성리에는 대흥산성 · 발어참성 등이 있다.

교육 · 문화

옛 교육기관으로 선죽교 북쪽 1㎞ 지점에 성균관이 있다. 992년(성종 11) 국자동에 국자감(國子監)을 창건하여 유학 교육의 효시를 이루었고, 충렬왕국학으로 고친 후 성균관으로 일컫게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규모를 확대하였고, 당시의 유학자 이색(李穡) · 정몽주가 교관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유수 김육(金堉)이 중건하였다. 그 외 고려시대 사립학교로는 현종최충(崔沖)이 세운 자하동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이 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6년 미국인 선교사 왓슨(Wasson)[왕영덕]과 감리교 감독 캔들러(Candler)의 주선으로 윤치호(尹致昊)가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Anglo · Korean School]이 있었다. 이 학교는 1917년에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고, 1950년에는 재단법인 송도학원(松都學園)으로 확충하고 송도중학교와 송도약학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한국전쟁 발발 후 휴교하였다가, 1953년 인천에서 송도중 · 고등학교를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주요 교육기관으로는 고려성균관(高麗成均館), 송도사범대학(松都師範大學), 개성예술대학(開城藝術大學), 개성공산대학(開城共産大學)을 비롯한 대학들과 여러 개의 전문학교 그리고 중학교, 소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들이 있다. 개성공산대학은 1959년 개성시 간부학교로 시작해 1960년 9월 1일 개성공산대학으로 개편되었다. 개성고려역사박물관 · 학생소년궁전 · 식물원 · 시립극장이 있다.

그 밖에 개성신문사 · 개성방송국 및 개성텔레비젼방송국 등의 언론기관과 판문체육관 · 개성경기장 · 판문경기장 등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단행본

『북한 동향과 분석』(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 2022)
『한국지명유래집: 북한편 1』(국토지리정보원, 2013)
『북한 국보유적 연혁 자료집』(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2009 북한 개요』(통일연구원, 2009)
『북한의 산업』(대한무역진흥공사, 1995)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인물의 고향: 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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