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기 시작한 1895년 을미사변으로부터 광복 때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하였거나, 옥고를 치른 사람으로서, 정부로부터 독립유공건국훈장·독립유공건국포장·독립유공대통령표창을 받은 사람과 그들의 유족으로서 연금(年金)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국내 유일의 독립운동가와 그 유족의 총집합체이다.
본부에는 회장과 부회장 2명에 사무국을 두고 있으며, 의전부(儀典部)가 특설되어 있다. 전국에 11개의 지회를 두고 있으며, 회원수는 1999년 현재 4,100명이다. 회원자격은 독립유공 수상자와 그 유족 중 연금 또는 생계부조금을 받는 사람 전원으로 하고 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항일투쟁은 한말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하여 시해된 1895년 을미사변을 시발로 국내 곳곳에서 의병항쟁으로 나타났고, 중국의 동북지방과 노령(露領)에서의 독립군의 항쟁에 이어 중국대륙에서의 무력항쟁으로 이어져, 광복을 맞을 때까지 근 반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이 기간중 수십만 명의 유명무명의 열사와 지사들이 민족의 제단 위에 거룩한 희생이 되었다.
이와 같이, 순국한 사람들의 유지를 현창(顯彰)하고 올바른 국권의 성장을 도모하려는 애국지사들의 염원이 한덩어리를 이루어, 1946년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등 삼의사유해봉송사업(三義士遺骸奉送事業)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그 뒤 광복 직후의 사회적 혼란과 6·25전쟁 등 계속되는 국가적 시련으로 말미암아 소망했던 광복회의 구성이 미루어져 왔으며,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포상을 본궤도에 올리자는 뜻은 있었으면서도 시행되지 못하였다.
1949년 당시 일차적으로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에게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수여되었고, 이어서 1953년 한국을 방문했던 자유중국 총통 장개석(蔣介石)에게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준 공로로 대한민국장이 수여된 정도에 그쳤다.
따라서,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바쳐 희생된 삼의사와 안중근(安重根)·김구(金九) 등 수많은 애국지사에 대한 보다 큰 규모의 정부포상이 기대되었다.
이와 같은 국민적 소망 속에서 마침내 1962년 삼일절을 기해 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하여 김구·안중근·윤봉길·이봉창·김창숙(金昌淑)·조만식(曺晩植)·안창호(安昌浩)·신익희(申翼熙) 등 18명에게 대한민국장이, 그리고 김성수(金性洙) 등 58명에게는 대통령장(大統領章)이, 김규식(金奎植) 등 128명에게는 국민장이 각각 추서 또는 수여되었다.
제1차 정부포상에 이어 이듬해인 1963년 광복절에는 독립유공자 774명에게 건국훈장 또는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이로써, 그 동안 수훈하거나 수상한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에 달하면서 수훈애국지사(受勳愛國志士)와 그 유족 중 연금을 받고 있는 사람을 회원으로 하여, 1965년 2월 27일 사단법인 ‘광복회’가 탄생하였으며, 초대 회장에는 기미독립운동의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李甲成)을 선임하였다.
그 뒤 정부의 포상은 계속되어 1968년 402명, 1977년 1,314명, 1980년 407명, 1982년 428명, 1983년 424명 등 1999년 11월 현재 8,698명에게 포상이 수여되었으며, 이 가운데는 한국독립에 공헌한 38명의 외국인에 대한 포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장을 받은 사람은 장개석·손문(孫文)·송미령(宋美齡)·진과부(陳果夫)·진기미(陳其美) 등 중국인 5명이었다.
회원의 친목단결을 위하여 여러 가지 회원경조지원(會員慶弔支援)을 시행하고, 민족정기의 선양을 위해서 해마다 광복절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무후선열추모제(無後先烈追慕祭)를 지내며, 또한 매년 11월 17일에는 독립운동선열추모제를 가진다. 1981년부터는 애국선열유적지 순례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해마다 지역별로 가지는 이 순례행사에는 선열후손 대학생들로 구성된 호우회(護友會)가 회동하여 유허지(遺墟地)를 동시에 돌면서 묘소가꾸기도 정성스럽게 하고 있다.
국민의식 계도를 위해서는 국민정신교육추진종합계획 및 통일안보교육실시계획에 따라 광복회에 독립정신홍보위원회를 두고 전국 중·고·대학생 및 군인·예비군을 대상으로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