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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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내용 요약

신민당은 1967년에 창당되었던 정당이다. 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과 맞서기 위해 민중당과 신한당이 정권 교체를 목표로 합당·창당하였다. 1967년 신민당의 윤보선은 박정희에게 116만 표차로 낙선하였고, 같은 해 총선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개헌선을 넘는 의석을 차지하였다. 1970년 제7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김대중이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박정희 후보에게 패했다. 이후 김영삼이 대표위원에 당선되어 신민당을 이끌던 중 10·26사태가 발생하였고, 1980년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자동해산되었다.

목차
정의
1967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내용

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과 맞서기 위하여 야당 계열인 민중당(民衆黨)신한당(新韓黨)이 정권 교체를 목표로 1967년 2월 7일 합당,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신민당의 보수민주세력은 광복송진우(宋鎭禹)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신익희(申翼熙)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장면(張勉)민주당(民主黨)을 원류로 한다.

1961년 5 · 16군사정변으로 모든 정당이 소멸되었다가 1963년 정치활동 재개와 함께 같은 해 2월 4일 윤보선(尹潽善)이 중심이 된 구파가 민정당(民政黨)을, 박순천(朴順天)을 추대한 신파가 민주당이라는 옛 이름 그대로 창당하였다. 같은 해 8월 국민의 당 창당 전후에 단일야당 형성에 실패한 이래 오랜 숙원이던 야당통합이 1965년 5월 민정 · 민주 양당의 합당으로 이루어졌다.

한일조약비준반대투쟁에서 야당의원의 총사퇴를 결정하였다가 박순천의 온건파가 약속을 깨고, 등원을 결정하자 윤보선은 이에 격분하여 신한당을 조직, 이탈하였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중당은 유진오(兪鎭午)를, 신한당은 윤보선을 각각 후보로 지명하여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28일 대통령후보 단일화와 야당연합전선을 마련하기 위한 유윤(兪尹:유진오와 윤보선)회담이 실현되었다.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야당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를 결성, 고문단에 이범석(李範奭) · 백남훈(白南薰) · 백낙준(白樂濬)을 추대하고 실행위원으로 허정(許政) · 장택상(張澤相) · 김도연(金度演) · 이인(李仁) · 정일형(鄭一亨) 등 20명을 선임하였다.

1967년 1월 23일에는 단일화문제를 양당의 대통령후보와 백낙준 · 이범석 등의 ‘4자회담’에 맡기기로 합의하고 같은 해 2월 5일 통합신당의 대통령후보에 윤보선, 당수에 유진오로 결정을 보아 2월 7일 신민당이 창당되었다. 강령은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고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 독재를 배격하고 제도와 기구를 쇄신하여 민주국가의 완성을 기하고, 민생의 안정, 사회악 일소, 민주적 평화통일을 주요 내용으로 정하였다.

이 당의 제6대 대통령후보 윤보선은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선거에서 336만여 표를 얻어 452만여 표를 얻은 박정희(朴正熙) 후보에게 116만 표 차로 낙선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지역구에서 27석, 전국구에서 17석, 도합 44석을 얻은 반면, 민주공화당은 개헌선(117석)을 넘는 의석을 차지하였다.

신민당은 7대 총선거는 유례 없는 부정선거라 주장, 6월 19일 ‘6 · 8부정선거규탄국민대회’를 안국동 로터리에서 강행하였고, 6월 30일 서울 관훈동 중앙당사에서 단식농성, 7월 1일 당사에서 민권선언대회 개최, 7월 10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 등으로 투쟁을 벌이다가 여야협상으로 경색된 정국을 풀었다.

1968년 전당대회는 단일지도체제를 규정한 새 당헌에 따라 총재에 유진오, 부총재에 유진산(柳珍山)을 선출하고, 윤보선 · 박순천을 당고문으로 추대하였다.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안 공고로 정국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런 가운데 신민당 소속 성낙현(成樂絃) · 조흥만(曺興萬) · 연주흠(延周欽) 등 세 의원의 3선개헌 지지성명이 나왔다. 신민당은 이들을 몰아내고 더 많은 이탈자의 확산방지를 위하여 소속의원 전원이 유진오 총재에게 탈당계를 맡겼다.

당적을 상실하면 의원직을 상실하는 정당법 규정을 활용하여, 1969년 9월 8일 해당(解黨)하고 같은 날짜로 신민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였다. 이른바 신민당의 이 ‘제2창당’은 해당된 지 13일 만인 9월 20일 창당전당대회를 열고 모든 요직과 체제를 그대로 승계하였다. 전당대회에서 총재에 유진오를 다시 추대하고, 총재는 부총재에 유진산(수석) · 정일형 · 이재형(李載瀅) · 조한백(趙漢栢)을 지명했다.

1970년 1월 16일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당헌을 개정하고 대표위원으로 유진산을 선출하였다. 제7대 대통령선거의 후보 지명을 위한 임시전당대회를 같은 해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 김대중(金大中)이 후보에 당선되었다. 신민당이 거당적으로 선거운동을 펼쳤으나, 1971년 4월 27일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539만 5,900표를 얻어 634만 2,828표를 얻은 박정희 후보에게 패하였다.

한편, 5월 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신민당은 지역구 당선자 65명과 전국구 당선자 24명 등 모두 89석을 확보하여 여당과의 의석수 차이가 24석으로 강력한 야당이 되었다. 신민당은 “호헌선(護憲線) 확보는 민주국민의 승리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국민에게 감사성명을 냈다. 이에 앞서 유진산 대표위원이 자기 지역구인 영등포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후보 1번으로 나섬으로, 당원들의 비난으로 당수직에서 물러나고, 김홍일(金弘壹)을 임시전당대회에서 새 대표위원으로 선출하였다.

그 뒤 유진산지지세력과 분규가 있었으나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특별선언에 따라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헌법 일부조항의 효력중지에 따라 정당활동이 중지되었다. 유신헌법 공포 후 잠시 중단되었던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유진산의원은 다시 당수에 선출되었으나 1974년 사망하였고, 새 대표위원에 김영삼(金泳三)이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구속인사 석방을 비롯한 인권옹호활동을 개시하고 중앙당에 개헌추진운영위원회를 두어 헌법개정과 체제개혁을 추진하는 강경노선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76년 1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서울지검 공안부에 입건되었으며, 비주류측은 김영삼노선을 비판하고 집단지도체제에 의한 당헌개정을 주장하고 이로 인한 당권경쟁이 청년당원 상호간의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같은 해 9월 이철승(李哲承)이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그의 대여온건노선인 중도통합론은 당내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 계열은 중도통합론에 반대하고 선명야당을 위하여 투쟁할 것을 결의, ‘야당성회복투쟁동지회’를 결성하였다.

신민당은 1978년 1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61명의 당선자를 내고 득표한 유효표 면에서 보면 민주공화당보다 1.1%를 더 얻었다. 그리하여 ‘야당의 승리’라는 논리로 자부하였다. 1979년 5월 정기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새로운 대표위원이 되었다.

3년 만에 당권을 되찾은 김영삼은 대여강경노선을 더욱 굳혔고, 여당은 총재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처분하였다. 야당 총재의 제명으로 정국이 경색된 속에서 10 · 26사태가 발생하고, 김대중이 복권되었다. 민주화를 향한 이른바 ‘3김(金)의 각축’이 예상되었으나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자동해산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정당사』(김종훈, 서울고시학회, 1969)
『한국민주주의와 정치발전』(한승조, 법문사, 1976)
『대한민국정당사』 Ⅰ·Ⅱ(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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