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9월 18일에 결성되어 1960년 4·19혁명으로 제2공화국의 정권을 장악하였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해산된 뒤 1963년에 재건되어 1965년 민중당으로 통합, 해체되었다.
민주당의 창당은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사사오입이라는 계산방식에 의하여 통과된 데 대하여, 민국당과 무소속의원 60명이 자유당의 전횡제지와 효율적인 헌법수호를 위하여 1954년 11월 30일 호헌동지회를 구성함으로써 비롯되었으며, 이를 모태로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되어 단일야당의 결성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들은 신당의 기본이념으로, ① 반공·반독재, ② 대의정치 및 책임정치 확립, ③ 사회정의에 입각한 국민경제체제 확립, ④ 평화적 국제질서 수립을 내세워 반자유당세력의 규합을 목표로 하였으나, 6개 항의 조직요강으로 인하여 일부 인사의 가입이 봉쇄되었다. 즉, 좌익전향자, 독재나 부패행위가 현저하여 규탄을 받은 자는 신당발기에 참여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혁신계나 족청계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할 수 없었다.
이는 한민당의 보수적인 성향과 그 후신인 민국당의 자유당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해서 나타난 것으로, 이로 인하여 신당결성은 자유민주파(보수파)와 민주대동파(혁신파)로 나누어져 신당발기작업이 매우 지연되기도 하였다.
1955년 초부터 9개월 동안이나 끌어오던 신당 발기작업은 결국 민국당이 중심이 되어 원내의 장면(張勉)·정일형(鄭一亨) 등 흥사단계, 현석호(玄錫虎)·이태용(李泰鎔) 등 자유당탈당계, 그리고 무소속 일부를 흡수하여 9월 18일 민주당을 발기시켰다. 그러나 원래의 민국당 출신과 이때 참여한 인사들간의 이해가 엇갈려 뒷날 민주당 구파와 신파가 대립되는 계기가 민주당 발기와 동시에 마련되었다.
창당 때 33명의 원내세력을 규합하였던 민주당의 간부 진용은 대표최고위원에 신익희(申翼熙), 최고위원에 조병옥(趙炳玉)·장면(張勉)·곽상훈(郭尙勳)·백남훈(白南薰)이었고, 중앙상무위원회의장에 성원경(成元慶)이었다. 당의 조직은 중앙당부 이외 지방에까지 확대하여 서울특별시 및 각 도 지부 외 시·군·면·동당부를 두고, 당원도 평당원에 해당하는 정당원과 비밀당원격인 특별당원제로 이원화시켰다.
민주당의 정강은 독재배격과 민주주의 발전기약, 공정한 자유선거에 의한 대의정치와 내각책임제 구현,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과 근로대중의 복지향상, 민족문화육성과 문화교류로 세계문화에의 공헌, 민주 우방과의 제휴를 통한 국토통일과 국제주의 확립 등으로 표방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공개적 반대운동으로 내각책임제 실현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1956년의 제3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은 신익희와 장면을 각각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워 선거에 임하였으나 선거를 10일 앞두고 신익희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정권교체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장면 후보의 부통령 당선에 그치고 말았다. 민주당의 도전으로 정권유지에 위협을 느끼게 된 이승만과 자유당은 권력을 이용하여 민주당을 탄압하였다. 그 일환으로 1956년 9월 장면 부통령에 대한 저격사건과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을 삭제하려는 개헌운동이 나타났다.
민주당에 대한 자유당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일반국민들은 민주당을 동정, 지지하였고, 이것이 1958년의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즉, 민주당은 정부의 선거개입에도 불구하고 79석을 획득하였고, 자유당은 원내 안정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3분의 2선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자유당은 민주당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국가보안법>을 제출하였고, 경위권을 발동하여 농성중인 민주당의원을 퇴장시킨 채 이를 통과시켰다. 이것이 ‘2·4파동’이다.
1960년의 제4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은 조병옥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그가 미국에서의 치료중 갑자기 죽어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당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자유당으로서는 자당의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李起鵬)의 당선이 어렵게 되자, 전국적인 부정선거 지령을 내려 투·개표를 조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주당은 전국적인 당조직을 이용하여 맹렬한 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부정에 항의하는 정치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학생들의 반독재운동이 일어났고, 그것이 4·19혁명 성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4·19혁명의 성공으로 민주당은 제2기를 맞게 되었다. 자유당 조직은 와해되고 민주당세력은 크게 신장되어 창당 이래 당의 숙원이던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1960년 7월 29일의 선거에서 4·19혁명의 완수를 내세워 절대다수로 승리, 전체 233의석 가운데 175석(75.1%)을 차지하여 집권 정당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세력신장의 이면에는 신파와 구파의 내분이라는 어두운 면이 있어 결국은 분당에 이르게 되었다.
구파와 신파의 알력은 창당 때부터 있어 왔으나, 반독재라는 구호에 묻혀 있다가 권력분배가 현실문제로 대두되자 표출된 것이다. 이들은 같은 정당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전혀 별개의 정당처럼 정권장악을 위하여 정략을 펼쳤기 때문에 정국의 안정을 기하지 못하고 제2공화국의 몰락을 자초하였을 뿐더러 군(軍)의 정치개입을 초래하였다. 불과 9개월 동안에 네 차례의 개각이 이루어질 정도로 민주당 내 각 계파간 이해관계의 대립은 심하였던 것이다.
민주당 내 구파와 신파의 내분은 국무총리의 인준과정에서부터 표면화되었다. 대통령에 선출된 윤보선(尹潽善)이 1차로 지명한 구파의 김도연(金度演)이 인준을 얻는 데 실패하였고, 2차로 지명한 장면이 국회의 인준을 얻어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구파는 협조를 거부, 결국 8월 23일 신파 위주로 조각을 하였으나 구파측이 반발하여 별도의 교섭단체인 민주당구파동지회를 만듦으로써 개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9월 12일 제2차 내각은 신파 8, 구파 5, 무소속 2의 비율로 조각되었다. 그러나 구파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당발족을 선언하고, 신파는 95명의 의원을 포섭하여 민주당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하였다. 신당발족을 선언한 구파는 또다시 협상파와 분당파로 나누어져, 분당파는 10월 18일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협상파는 민주당에 합작하였다. 이로써 민주당은 표면상으로 안정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는 소장파와 노장파, 그리고 합작파가 대립하여 요직분배를 놓고 심각한 의견대립을 보였다. 이 가운데 소장파는 1961년 1월 26일 ‘신풍회(新風會)’를 만들어 노장파와 행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장면은 분파작용을 막기 위하여 1월 30일 3차 내각을 발족시켜 각 파별로 요직을 안배하였으나 당내 파쟁은 종식되지 않았다.
이러는 가운데 합작파는 별도로 ‘정안회(政安會)’를 만들어 행동하였고, 신풍회는 당직개편을 요구하는 등 혼란은 더하여갔다. 이리하여 5월 3일 제4차 내각이 발족되었으나, 노장파가 실권을 장악한 데 대하여 신풍회는 당을 떠날 태세를 보였고, 노장파 내에서도 비주류는 별도로 중도파라는 단체를 만들어 신풍회와 제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7·29총선 이래 압도적인 다수의석을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분파작용에 진통을 거듭 겪어, 민주당 정부는 정국의 안정도 내각의 안정도 이루지 못한 채 5·16군사정변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민주당의 제3기는 정치활동이 재개되고 난 지 약 6개월 만인 1963년 7월 18일 창당대회를 가지고 박순천(朴順天)을 당총재로 추대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는 5·16군사정변으로 해산된 민주당이 재건된 것으로 반독재와 민주주의 수호 및 군정의 종식을 내걸었으나, 1963년 11월 26일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13명의 당선자밖에 내지 못하였다.
제2공화국시대의 실정(失政)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 민주당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은 국민의 당, 자유민주당과 함께 삼민회(三民會)라는 교섭단체를 만들어 원내활동을 벌이다가 1964년 9월 17일 국민의 당을 흡수, 대표최고위원에 박순천, 최고위원에 허정(許政)을 선출하였다.
그 뒤 민주당은 효율적인 행정부 견제와 공화당(共和黨)의 원내 독주를 막기 위해서는 야당 통합밖에 없다는 국민의 여론에 좇아 민정당(民政黨)과 합당교섭에 나서서, 1965년 5월 3일 민중당으로 발전적 해체를 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정당 활동을 끝마치게 되었다.
민주당은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에까지 인맥을 중심으로 지속성을 보이고 있지만, 한국 정당이 가지고 있는 병폐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즉, 근대적 대중정당이라기보다는 인간적 유대관계로 결집된 명사정당이었고, 정책정당이라기보다는 권력에의 접근이라는 개인적 이익에 집착하여 특정 지도자를 따라 이합집산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정강정책에서 화려하게 내세운 이념이나 선거에서 내건 공약은 비현실적이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 국민의 정치적 요구를 국정에 반영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국민의 요구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하여 국민의 불신과 정치적 무능을 노출시켰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중심으로 장기집권반대투쟁·반독재투쟁을 전개하여 한국 정당사에서 야당으로서는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집권에 성공한 정당이라는 데서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