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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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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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3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내용

5·16세력의 민정 참여에 대항하기 위하여 1963년 창당하여 1년간 활동하다가 1964년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1963년 1월 정치활동 재개 이후 재야세력의 결속된 힘만이 군정세력을 꺾을 수 있다는 공통된 신념에서 야당통합운동이 몇 갈래로 전개되었다.

민주당과의 합작에는 실패하였지만, 가칭 신정당(新政黨) 위원장 허정(許政)과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 김병로(金炳魯) 등을 중심으로 야당통합문제가 제기되어 1963년 7월 18일, 김병로·허정과 가칭 민우당(民友黨) 고문 이범석(李範奭)이 무조건 통합을 다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이들 3자와 무소속의 통합이 급진전되었다. 그 결과 8월 1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열어 김병로·허정·이범석을 대표위원으로 선출하고 9월 10일 정당등록을 함으로써 국민의 당이 발족되었다.

그러나 9월 13일 윤보선(尹潽善)을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여 민정당이 이탈하자, 국민의 당은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비민정당계와 김병로계에 속한 일부 민정당계 대의원만으로 허정을 후보로 지명하였다. 선거유세에서 허정은 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朴正熙)의 사퇴요구, 황태성(黃泰成) 간첩사건 해명 요구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선언을 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하였으나 6명이나 난립한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하여 사퇴하였다.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후보자 공천을 둘러싸고 당내 허정계와 이범석계 간에 미묘한 갈등을 겪고 전국구후보 22명, 지역구후보 120명을 내세웠으나 2명밖에 당선시키지 못하였다. 이때 총투표 수 962만2183표의 8.8%인 82만2천표를 얻어 12개 정당 중 4위를 차지하였다.

국민의 당은 본래 그 전신인 신정당부터가 민주당계·자유당계 및 관료 출신인 무소속계의 3파로 구성되어 있었고, 국민의 당으로 개편되면서 여기에 다시 세칭 구 족청세력(舊族靑勢力)으로 알려진 민우당계와 무소속계가 참여하여 이질적인 5개 파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두 차례의 선거에서 패배하자 그 책임 추궁을 둘러싸고 분열상을 드러냈다.

그 결과 대표최고위원 김병로의 정계 은퇴와 최고위원 이범석의 탈당 후, 자체 내의 정비보다는 민주당 및 자유민주당과의 3당통합론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 당은 대일 저자세외교반대 범국민투쟁에 참여하였고, 민정당과 협력하여 비상계엄해제요구결의안을 내기도 하였다.

그 뒤 3당통합을 위한 협상이 계속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1964년 9월 17일에야 국민의 당과 민주당만으로 양당의 통합을 정식으로 선언하고 국민의 당은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었다.

이 당의 정강은, 첫째 자유민주주의의 터전 위에 민주정치제도의 정립으로 바른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둘째 자유경제체제 아래 자립경제에 의한 복지사회를 마련하며, 셋째 민족문화를 빛내고 도의심과 근로정신을 북돋우는 문화국가를 이룩하고, 넷째 유엔헌장에 바탕을 둔 국제사회와의 유대 강화 및 자유세계의 기본질서 아래의 국토통일, 집단안전보장체제 아래의 국력배양과 실질적 반공강화였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정당사』 1(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73)
『선거관리위원회사1963∼1993』(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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