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8월 국회의 한일협정비준심의특별위원회에서 공화당의원만으로 비준동의가 처리되자 민중당 소속의원 61명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민중당내 강경파인 윤보선(尹潽善)계는 한일협정을 저지하지 못한 책임으로 국회의원직의 사퇴와 당의 해체를 완강히 주장하였다. 반면, 박순천(朴順天) 대표최고위원을 중심으로 한 당 주류온건파는 대정부투쟁과 헌정질서 범위 안에서의 원내투쟁으로 맞섰다.
이와 같이 두 파의 의견이 조정될 수 없는 심각한 국면에 접어든 가운데, 윤보선외 7명의 국회의원은 소속지구당에 탈당계를 제출하여 <헌법> 규정에 따라 자동적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민중당 강경파 당원들은 주류온건파에 대립하는 조직기구로서 민중당정화동지회를 주축으로 한 신당운동을 전개하다가 1965년 11월 민중당 집단탈당과 신당참여를 공식으로 선언하고, 정화동지회를 해체함으로써 통합단일야당인 민중당은 창당 5개월여 만에 사실상 분당되었다.
신한당은 전 민중당 강경파였던 김도연(金度演)·서민호(徐珉濠) 등과 정화동지회 의장단이 중심이 되어 1966년 2월 창당발기인대회, 3월 창당대회, 5월 30일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을 하였다.
창당대회에서 단일지도체제를 골자로 하는 당헌을 채택하고 윤보선을 총재로 추대하는 한편, 1967년 실시된 제6대 대통령후보로 공천, 지명하였다.
또한, 이 창당대회 결의문에서 한일협정의 내용 중 매국적 부분의 개폐 요구와 이를 위한 범국민투쟁의 계속적인 전개천명, 다수에 의한 민주공화당의 의회정치 부인행위에 대한 경고, 베트남에 대한 국군의 증파재고요청, 한일협정으로 인한 구속·제적학생과 추방교수에 대한 복교 및 복권 등을 요구하고, 또 민중당에 대해서는 한일협정비준의 방조와 베트남파병 지지를 이유로 비판하여,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었다.
창당 후 신한당은 민중당과의 반목을 계속하였으나 신한당의 총재 윤보선과 민중당 대통령후보 유진오(兪鎭午) 사이에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와 야당 통합의 가능성이 협의되어 1967년 2월 신한당은 신민당(新民黨)으로 신설 합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