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세력에 반대하는 범야 집결체를 목표로 1963년 6월에 발족하여 1965년 5월까지 존속하였다.
1963년 1월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5·16군사정변 주체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될 여당에 대결하기 위한 단일정당 형성운동으로 윤보선(尹潽善)과 김병로(金炳魯) 등을 중심으로 구신민당·구자유당·구민주당·무소속 등 4개 정파연합의 단일야당 형성공작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이들은 1963년 1월 27일 발기인대회를 개최하여, 군정 당국의 실정을 비난하고 민정이양에 관한 공약의 실천을 요구하는 한편, 온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는 내용의 발기취지문을 선언하였다. 그 뒤 창당 과정에서 지구당의 조직을 에워싸고 구신민당계와 비신민당계간의 알력이 있었고, 박정희(朴正熙)의 군정 4년 연장안을 골자로 하는 3·16성명으로 난관에 부닥쳤다.
그러나 재야 정치세력의 공동투쟁으로 이를 유보하게 하고, 1963년 6월 28일 정식 발족되었다. 민정당은 먼저 4대의혹사건규명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여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초 목적한 범야단일정당 형성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대통령 후보 사전조절 문제로 끝내 타협을 보지 못하고 5월 14일 김병로 대표최고위원이 탈당하였다.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윤보선은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고,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 박정희가 주창한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격하고, ‘사상논쟁’을 본격화하였으나, 근소한 표차로 패하였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 후보 하나에 야당 후보는 다수라는 역경에서도 지역구에서 27석, 전국구에서 14석을 얻어 국회 총의석 41석을 얻음으로써 제6대 국회에서 제1야당으로 등장하였다.
1963년 8월 2일<언론윤리위원회법> 통과를 계기로 민정당은 묵계설파동으로 유진산계(柳珍山系)의 온건파와 윤보선 계의 강경파 사이의 알력·내분을 드러내어, 강경파는 끝내 유진산을 제명시켰다.
온건파의 대표를 제명한 민정당은 제1야당으로서의 명실상부한 기반을 굳히기 위한 광범한 흡수공작이 절실해짐에 따라 그 동안 추진해 오던 민정당과 자유민주당의 양당통합운동을 급속도로 진척시켰다. 그리고 1964년 11월 26일자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흡수합당 신고하였다.
1965년 2월 20일 한일 양국 정부가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가조인하게 되자, 민정당은 대 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반대투쟁에 나섰다.
1963년 총선 이래의 숙원이었던 야당통합이 1965년 5월 3일 민정·민주 양당통합선언대회로 대단원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어, 5월 8일 두 당의 통합과 민중당(民衆黨)의 창당을 선언,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