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금연(錦淵). 평안남도 용강 출신.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신학(神學)을 전공하면서 재미유학생회(在美留學生會) 조직에 참여하여 외교부장으로 피선되어 독립정신 고취와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5년 뉴저지주 드루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6년 이태영(李兌榮)과 결혼했다. 일제강점기에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과 물자행정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수립 후 1948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고문, 구미지역파견 친선사절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49년 유엔한국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1960년까지 재직하였다. 1950년 2대국회부터 9대국회까지 8선에 걸쳐 의정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중 1950년 2대 국회외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사를 창립,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이후 당시 야당인 민주당에 속하여 외교부장을 지냈으며, 4·19혁명 후 민주당 내각에서는 외무부장관에 기용되었다. 이후 계속 야당에 소속되어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관한 조약의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6년 신한당(新韓黨) 고문, 이듬해에는 신민당(新民黨) 부총재가 되었다.
1969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하였고, 그 해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1년 신민당선거대책본부장으로 당시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金大中)의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1974년 신민당 고문에 추대되고, 이듬해 통일연구협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6년 3월 유신정치에 반대하는 이른바 ‘3·1명동사건’에 연루되어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978년의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는 자격정지로 아들 대철(大哲)에게 선거구를 물려주고 이후 재야에 머물렀다. 저서로 『UN과 한국』·『국제연합독본』·『유엔의 설립과 업적』·『오직 한길로』 등이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