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후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임시정부 계통과 노선을 달리했고,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유세활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구(汝耉)이며 호는 해공(海公)이다. 이명으로는 임방호(壬邦乎)를 사용했다. 경기도 광주 출생. 조선시대 때의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서 내무차장 · 외무차장 등을 역임했고, 귀국 후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한학을 익혔고,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유학 시절 『학지광』(學之光)』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7년부터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인 보성법률고등학교에서 비교헌법 등의 강의를 맡았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W.)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됨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 · 북경 · 상해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아보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 · 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그는 1919년 3월 다시 상해로 떠나 그로부터 26년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일본유학생친목단체인 유일학회친목회(留日學會親睦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뒤 내무총장 · 법무총장 · 문교부장 · 외무부장 등을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이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시작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군사행동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 있으면서도, 정부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할 뿐 실력은 저항군에 있다는 믿음 아래,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청년들에 의한 군대조직을 시도해 보고, 당시 상승기에 있던 중국혁명군과 연결하여 한중합작에 의한 군사행동의 실현을 추진해 보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이 편성되자 신익희는 인공 내각의 체신부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그는 곧바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부회장을 맡았으며, 국민대학 학장과 자유신문의 사장직도 맡았다. 당시 신익희는 귀국 후,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 ·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촉하였다. 그 뒤 이승만(李承晩)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혔다. 그 동안 그는 3선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갔으며, 권력의 연장을 위하여 사사오입개헌까지 자행한 이승만에게 민심이 등을 돌리자, 1955년 장면(張勉) · 조병옥(趙炳玉)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창당하였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1956년 5월 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에는 많은 인파가 모여 그의 인기를 실증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 뒤인 5월 5일 호남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에게는 추모표로서 185만여 표가 던져졌으며,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