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현곡(玄谷).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 출신. 1930년 광주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중동중학교를 퇴교당하고,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민탁고등학교(北京民鐸高等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1935년에 일제에 잡혀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일본 이치타니(市谷)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2년 8개월만에 신병으로 가석방, 고국으로 압송되어 광복 때까지 향리에서 농촌운동과 농민교육에 종사하였다. 1945년 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여 제1공화국 자유당 때에는 야당계 무소속으로 반독재운동에 민주당과 행동을 같이하였으며, 5·16군사정변 후에는 구신민당의 원내총무 · 정무위원 등을 지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당선에 이르기까지 5선의원을 지냈고, 두 번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였다. 1967년에는 「정치정화법」 · 「반공법」 등의 위반으로 투옥되었으나 병보석되었고, 1973년 동경에서의 이른바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 때에는 참고인으로 곤욕을 치렀다.
1971년 신민당 주류의 유진산(柳珍山)과 결별하고 1973년 통일당을 창당, 당수로 있으면서 신민당의 반체제운동에 동조하는 제2야당의 구실을 하였다.
비록, 재정적인 어려움과 원내세력의 미미함 때문에 통일당의 존재가 큰 각광을 받지 못하였지만 신민당과의 합당의 길을 모색하였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자, 재야의 반체제 세력과의 합작으로 제3당의 출현을 보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야당생활로 일관하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장지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리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