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산은 해방 이후 3, 4, 5, 6, 7, 8, 9대 국회의원과 신민당 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5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26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독서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광복 여러 청년 조직을 결성해 청년운동을 하던 중 정계에 투신하였다. 1954년 이래 3~9대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야당 중진 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다. 1974년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결장암으로 죽었다. 유진산은 권모술수에 능한 합리주의자로, 민주정치의 기본을 대화와 타협에 두었던 정치인이었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 교내 항일벽보사건으로 자퇴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겨 1923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원에서 영어를 수학한 뒤 정경학부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독서회사건으로 이치타니형무소(市谷刑務所)에 투옥되었다. 1932년에 귀국하여 쌍엽농민회(雙葉農民會)를 만들어 농민운동을 펴다가 일본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34년 일본 관헌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5년에서 광복까지 『농민독본(農民讀本)』의 편집을 하면서 필명을 진산(眞山:나중에 珍山으로 고침.)이라 하고, 전진한(錢鎭漢) · 김산(金山) 등과 농민운동을 폈으며, 이 무렵부터 조병옥(趙炳玉) · 백관수(白寬洙) · 장택상(張澤相) 등과 교유하였다.
광복을 맞아 우익청년단체 흥국사(興國社)를 조직하여 좌익의 최대단체였던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朝鮮建國促進靑年同盟, 建靑)을 해체시키고,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의 주동세력이 중심이 된 인민대표자대회를 회유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일성(金日成) · 강양욱(康良煜)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청년단원들을 평양에 파견는 공작에 참여했다. 또한, 대한혁신청년회를 결성하여 임시정부요인과 건국 추진에 노력하였으며, 1946년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을 창설하여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1947년 7월에는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의 후신으로 청년조선총동맹(靑年朝鮮總同盟)의 결성을 주도했다.
미군정 하에서 두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이승만(李承晩)정권의 독재화에 항쟁하여 1952년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조병옥 등과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다가 계엄군에 체포되어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54년 무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 그 해 4사5입개헌 때에는 신익희(申翼熙) · 조병옥 등과 호헌동지회를 발족시켰다. 1955년 신당발기추진8인위원회 위원, 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 선거참모를 거쳐 1958년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민주당 원내총무가 되었다.
1960년 불온문서 · 원면부정(原綿不正) 사건의 국회조사위원장,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참모를 지내며 제5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4 · 19혁명 후 출범한 장면(張勉)정권에 도전, 민주당의 신구파를 보수양당으로 분당시켜 1961년 2월 김도연(金度演)과 구파 중심의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다. 간사장이 되어 그 해 3월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초청한 청와대시국수습4자회담에 참석하였다.
5 · 16 군사정변 때에는 55일간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고, 1962년 박정희(朴正熙)의 3 · 22 군정연장성명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였다. 민정이양이 된 1963년 5월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여 김병로(金炳魯)를 당대표로 추대하였고, 그 해 11월 전국구로 제6대 국회에 진출하였다. 1964년 언론윤리법안통과를 둘러싼 세칭 ‘사쿠라논쟁’으로 윤보선과 격돌하였다가 민정당 의원총회에서 제명되었으며, 1965년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1966년 민중당 부총재가 되었고, 1967년 야당통합을 이룬 신민당 부총재가 되었으며, 그 해서울 영등포에서 제7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70년 신민당 총재에 당선, 야당가의 총수가 되어 그 해 8월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가졌다. 1971년 총선에서 영등포 지역구를 포기하고, 자신이 전국구 1번을 결정한 이른바 ‘ 진산파동(珍山波動)’으로 총재직을 사임하였다가 다시 당권에 도전하여 1972년 총재에 재선되었으나, 불법전당대회에서의 당선이라는 이유로 법원에 피소되어 당수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1973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수로 당선되어 같은 해 제2차 박정희 · 유진산회담을 가졌다. 1974년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결장암으로 죽었다. 신민당장으로 충청남도 금산군 향리에 묻혔다.
유진산은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해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평가를 얻었고, 정적(政敵)과의 타협에 철저하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합리주의자라고 해서 ‘사쿠라’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정치란 칼로 두부를 자르듯 일도양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라는 소신을 피력한 바와 같이 민주정치의 기본을 대화와 타협에 두었던 정치인이었다.
회고록으로 『해뜨는 지평선』이 있다.
197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